
전도서 9장 7~10절
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8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흔아홉의 나이, 아내와 세 딸을 둔 가장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곧 세상을 떠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병원 침상에서 그는 목사에게서 복음을 들었고, 죽기 전 아내와 딸들에게 자신이 믿게 된 예수님을 전하라는 권면을 받았습니다. 그날 밤 그는 자녀들을 불러 모아 유언을 남겼습니다. 며칠 후,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같은 주간, 한 카센터 주인은 손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옆 건물의 건물주가 세상을 떠나 캐딜락 영구차가 서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암 수술을 마치고 거의 회복했다고, 앞으로의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삼 개월 만에 암이 재발했고, 그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같은 날 아침, 뉴스에서는 한 정치인의 부고가 흘러나왔습니다. 국회의원이든, 건물주이든, 이름 없는 가장이든, 죽음은 지위를 가리지 않고 찾아왔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살아있는 우리는, 이미 죽은 그들보다 무엇이 나은 것일까?"
성경은 이 질문에 뜻밖의 방식으로 대답합니다. 살아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 전도서의 말씀처럼,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는 자신이 언젠가 죽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이 앎이야말로 살아있는 자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단순히 생존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살아있다 해도 이미 죽은 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육신의 죽음 너머에 있는 '둘째 사망'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로 인해 그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깨닫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심판에서 건짐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그 사람만이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서 9장은 이 죽음에 대한 묵상 직후에 전혀 다른 어조로 말합니다. "가서 기쁨으로 음식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셔라. 옷을 희게 입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라.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아라." 이것은 언뜻 전도서의 전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는 탄식으로 시작하는 책이 아니었던가요? 그런데 왜 갑자기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라는 것일까요?
사실 이런 구절은 전도서 곳곳에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사람이 수고하여 먹고 마시며 그 가운데서 낙을 누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조차도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전도서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대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신명기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언약의 구조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비율입니다. 복에 대한 말씀은 몇 절에 불과하지만, 저주에 대한 말씀은 무려 오십 절이 넘게 이어집니다. 그 저주의 내용은 상상하기도 힘든 것들입니다. 흉년, 질병, 그리고 성이 포위당했을 때 부모가 자기 자녀를 먹어야 하는 극한의 참상까지,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열왕기하는 기록합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나면, "먹고 마시며 옷을 깨끗이 입고 기름을 바르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자들이, 여전히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공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행한 대로 정확히 갚으신다면, 우리 중 누구도 물 한 모금 마실 자격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9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오늘 우리가 평범하게 먹고 마시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기쁘게 받아주셨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일으킨 후 모인 무리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죄 사함을 받으라고, 그러면 "새롭게 되는 날"이 온다고 말입니다. 옛 번역에서는 이를 "유쾌하게 되는 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 이것이야말로 참된 기쁨의 근원입니다.
베드로는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 하늘에 계신다고 전합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와 빌립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진 성도들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졌다고 선언합니다. 만물이 아직 완전히 그분께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도, 그 일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확정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절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허무주의도 아니고,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도 아닌, 오히려 주어진 하루하루를 힘을 다해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베드로전서는 이 진리를 더욱 선명하게 정리합니다. 성도는 여러 시험으로 인해 잠깐 근심할 수 있지만, 동시에 크게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팔구십 년의 인생 속에서 겪는 근심은 분명 실재하는 고통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구원이라는 영원한 기쁨에 비하면 그것은 "잠깐"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했음에도 사랑하고, 지금도 보지 못하지만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는 그 고백은, 세상의 기준으로 남과 비교해서 나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그러니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마흔아홉에 세상을 떠난 그 가장, 건물주, 정치인, 이들과 아직 살아있는 우리 사이에 정말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재산의 많고 적음도,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내가 먹고 마시는 이 평범한 일상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가, 그리고 그 은혜를 주신 분이 이미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주셨다는 사실을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감사함으로 받아 누리며, 손이 할 수 있는 일을 힘을 다해 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스올에는 일도 계획도 지식도 지혜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그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기쁘게 받으셨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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