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그런 후에 내가 본즉 악인들은 장사지낸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전도서 8:9~14)
몇 해 전, 어느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평생 남을 등쳐먹으며 살아온 한 노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빚 독촉으로 사람을 죽음까지 몰고 갔던 사람, 위조 서류로 남의 땅을 가로챈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장례식장에는 조문객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살았던 바로 그 동네 사람들이, 그가 못살게 굴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찾아와 "참 훌륭한 분이셨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의 재산으로 세운 마을회관 앞에는 그의 이름을 새긴 비석까지 서 있었습니다.
이런 장면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도대체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가?" 전도자 솔로몬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삼천 년 전에 말입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낱낱이 살펴봅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쉽게 말하면, 이 세상에는 권력을 쥔 사람과 그 권력에 짓눌려 고통받는 사람이 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왕과 백성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 중 하나는 높아지고 싶은 마음, 남 위에 서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은 낯설지 않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자기 욕심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성도들의 삶을 주관하려 합니다. 실제로 어느 모임에서 한 사람이 "저 목사님 유튜브 구독자가 삼만 팔천 명이래요"라고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실제로는 삼천팔백 명이었습니다. 숫자가 크고 작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숫자를 부풀리고 싶어 하는 마음, 곧 사람을 더 많이 주장하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고후 1:24). 베드로도 장로들에게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고 당부했습니다. 목회자는 사람을 주관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어야 합니다.
전도서 8장 10절부터는 더 답답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악하게 살던 자들이 죽어서 장례를 치르는데, 오히려 그가 악행을 저질렀던 바로 그 동네에서 칭송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서두에 소개한 장례식 이야기가 바로 이 구절의 재현입니다.
11절은 이 현상의 이유를 정확히 짚어냅니다.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만약 나쁜 짓을 하는 사람마다 그 자리에서 벼락을 맞아 죽는다면, 세상에 악을 행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은 백 번 죄를 짓고도 버젓이 잘 삽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더 담대하게 악으로 향합니다.
실제 사례도 있었습니다. 얼마 전 한 시사프로그램이 국회의원들의 농지 소유 문제를 다뤘습니다. 우리나라 법은 직접 농사짓지 않는 사람이 농지를 사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당수 국회의원들이 배우자 명의로 농지를 사들이고, 지목을 바꾸고, 개발 정보를 이용해 땅값을 올렸습니다. 그러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잘 살고, 그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줍니다. 이런 사람들이 만약 그 즉시 벌을 받는다면 누가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벌이 더디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마음이 점점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시편 73편의 기자도 똑같은 고민을 했습니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시 73:12,14). 정직하게 살려고 애쓰는 자신은 하루하루가 고달픈데, 악인들은 형통하기만 합니다.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15절) 즉, 차라리 나도 악인처럼 살까 하는 유혹이 그를 흔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 기자가 답을 얻은 곳은 서재도, 논쟁의 자리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7절).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설 때 비로소 그는 악인의 형통이 잠깐이며 영원한 심판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전도자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여전히 헛됩니다.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14절). 착한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착한 사람이 받고, 나쁜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나쁜 사람이 안 받는 이 뒤바뀐 현실 앞에서, 하박국 선지자도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단순했습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그리고 이 모든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답은 십자가에서 주어졌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한편의 강도는 예수님이 아무 죄 없이 고난당하신다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했을 때, 그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처럼 고난받으신 그 자리, 바로 거기서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이라는 세상의 뒤바뀐 질서가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악을 심판받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겪는 환난은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고후 4:17)입니다. 진짜 저주는 벌을 안 받는 것처럼 보이며 방치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벌이 더디다는 이유로 악을 행하는 데 담대해집니다. 그러나 성도는 다른 담대함을 가진 자들입니다. 죄를 짓는 데 담대한 것이 아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지니라"(히 4:16)는 말씀처럼,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전도서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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