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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전도서

전도서 - 내일을 모르는 인생, 오늘을 사는 믿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19.

"무슨 일에든지 때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전도서 8:6~8)

어느 목사님께서 캐나다 나나이모로 떠나는 날 아침, 평소와 다름없이 이발소에 앉아 있었습니다. 세 달 전부터 준비한 여행이었습니다. 비행기표도, 숙소도, 집회 장소로 쓸 도서관 예약도 이미 다 끝나 있었습니다. 창밖에는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지만, "
이 정도로 결항이야 되겠나" 싶어 예정대로 이발소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항공사에서는 이미 결항 문자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발 중이라 확인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얼마 후 여행사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모든 계획이 흔들렸습니다. "결항입니다." 세 달을 준비한 일정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 반응입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결항 소식을 전했을 때, 두 사람 모두 담담했습니다. "
못 가면 못 가는 거고, 가면 가는 거지." 이 평온함은 신앙이 훌륭해서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살아오면서 자신의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경험을 수도 없이 겪었기 때문에, 몸으로 체득한 것이었습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되고, 막으시면 안 되는 것, 그 단순한 진리가 삶의 습관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작은 사건 하나가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전도서 8장 6절에서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일에든지 때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우리는 아무리 철저히 준비해도,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세워도,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나이모에는 '
국 할머니'라 불리는 분이 계셨다고 합니다. 열세 살 때, 한국전쟁이 터졌습니다. 판사였던 아버지가 북으로 납치되어 끌려가셨고, 그 이후로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어린 소녀는 그 사건을 통해 인간의 부와 명성이라는 것이 정말 하루아침에 다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우리는 흔히 오늘의 평안함 속에서도 불안해합니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사실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무 어려움이 없는데도, 내일 닥칠지 모르는 일에 대한 염려로 오늘의 평안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의 기운을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아무리 "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자"고 다짐해도 염려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연약한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에게 장래의 일을 알려줄 수 있을까요?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아무도 장래 일을 알지 못하며, 알려줄 자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른다는 사실을 그냥 받아들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점쟁이를 찾아갔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점쟁이를 반드시 처벌하라고 엄중히 경고합니다. 인간의 미래를 점으로 알려주려는 시도 자체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이런 모습이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겉으로는 기독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온갖 미래를 예측하며 성도들을 미혹하는 콘텐츠가 넘쳐납니다. 개인의 신수(身數)를 봐주는 수준을 넘어,
"종말에 어떻게 살아남아 구원받을 것인가"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만드는 가르침들이 그렇습니다. 세대주의적 종말론이든 신사도 운동이든, 성경 몇 구절을 짜맞춰 재림의 때와 환난의 시기를 예측하는 자들은 한결같이 틀렸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
장래 일을 아신다'는 표현은 구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을, 신약에서는 재림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 재림의 날과 시간은 결코 인간이 계산해서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은 자에게는, 그날이 오늘이라 해도 상관없는 것입니다. 온갖 대환난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자들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그 말씀을 진정으로 믿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믿지 못하기에 두려워하고, 두려워하기에 미혹에 쉽게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둘째 사망에 던져지는 자들의 목록 맨 앞자리에 있는 것이 바로 "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두려움의 뿌리는 불신앙입니다. 믿지 않기에 두려워하고, 두려워하기에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다가 결국 흉악함과 거짓과 우상숭배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이깁니다"(요일 4:18). 두려움이 있다면, 아직 그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하지 못했다는 신호입니다.

8절의 "
바람"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루아흐'입니다. 이 단어는 바람이라는 뜻으로 가장 흔히 쓰이지만, 동시에 '성령'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본문에서는 일차적으로 자연의 바람을 뜻하지만, 그 함의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바람을 일으키거나 멈추게 할 사람이 세상에 없듯, 자신이 죽을 날을 정하거나 미룰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전쟁이 닥치면 피할 자가 없듯, 악을 행하고도 그 결과에서 벗어날 자가 없습니다.

여기서 본문은 놀라운 말을 덧붙입니다. "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의 예측과 계획 자체가 '악'이라는 선언입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계산과 자기 힘으로 미래를 장악하려는 태도, 그것이 곧 악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장은 이 문제를 더욱 구체적으로 짚어줍니다. "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여기서 죄와 악으로 규정되는 것은 사업 계획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계획을 세우면서 주님의 뜻을 묻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도 저것도 하리라"고 해야 할 것을, 자신이 온전한 주체가 되어 스스로 미래를 장악하겠다고 나선 것이 허탄한 자랑이며 악입니다. 믿는 자란 자신이 안개처럼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로 생생하게 보여주셨습니다(눅 12:13-21).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유산 분배 문제로 형제 사이를 중재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억울한 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뜻밖의 답을 하십니다. "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그러시고는 한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풍성한 수확을 거둔 부자는 곳간이 부족하자 더 크게 지어 쌓아두기로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
내 영혼아,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자."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냉정했습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면, 네가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오늘 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면서, 재물을 의지하며 미래를 계획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만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삶, 이것이 재물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삶의 실체입니다.

이 원리는 세속적인 삶의 영역에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의 영역에서도 우리는 종종 "
내가 지금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헌신하면, 내 미래가 더 나아질 것"이라고 계산합니다. 내가 혜택을 못 받으면 자식이라도 받을 것이라 여기며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자신과 후손의 미래를 주님의 손이 아니라 자기 행위로 좌우하려는 시도입니다.

성경의 왕들의 역사를 보면 이 계산이 얼마나 허망한지 드러납니다. 선한 왕 히스기야에게서 악한 왕 므낫세가 태어났습니다. 므낫세도 악했고 그 아들 아몬도 악했습니다. 그런데 므낫세의 손자 요시야는 선한 왕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후손의 복을 결정한다는 공식은 성경 전체를 놓고 보면 오히려 예외에 가깝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받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렇다고 "
그러면 나는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반응하는 것도 답이 아닙니다. 우리는 애초에 늘 자기 마음대로 살아왔던 존재들 아닙니까? 본문이 말하려는 바는 훨씬 단순합니다. 우리의 장래는 우리 손에 있지 않고, 오직 주님의 손에 달려 있으니 그 손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시며,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이십니다.

예레미야 51장에서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목격한 후에도 이렇게 외칩니다. "
너희 마음을 나약하게 말며, 이 땅에서 들리는 소문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소문은 이 해에도 있겠고 저 해에도 있으리라." 바벨론이 한창 승승장구하던 그 시절에, 예레미야는 이미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며 백성을 위로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서도 같은 메시지가 반복됩니다. "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예레미야의 바벨론이 문자적 바벨론이었다면, 요한계시록의 바벨론은 로마이자 동시에 이 세상 전체를 상징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요란해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 요란함으로부터 나오라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은 사도 요한이 본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을 전합니다. "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리고 보좌에 앉으신 이가 선언하십니다.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이 환상은 앞으로 이루어질 미래가 아니라, 이미 완성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도 요한이 "" 것은 미래의 예언이 아니라 이미 성취된 실재였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예수님이 곧 알파와 오메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받는 자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나이모행 비행기가 결항되었을 때 담담할 수 있었던 그 평안은 어디서 왔을까요? 계획이 무너지는 경험을 수없이 겪으며 몸으로 배운 진리, 곧 "
주께서 허락하시면 되고 막으시면 못 한다"는 믿음에서 왔습니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바람을 다스릴 수도, 죽는 날을 정할 수도, 전쟁을 피할 수도 없는 연약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연약함 때문에 우리는 점쟁이를 찾아가거나 종말론적 공포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선언하신 그분, 알파와 오메가 되신 그분이 우리의 장래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요란해도, 소문이 이 해에도 저 해에도 계속되어도, 우리는 이미 완성된 그 나라를 소망하며 오늘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장래 일을 아는 것보다 더 큰 은혜입니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전도서 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