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도서 7:1~4)
장례식장에는 특별한 공기가 흐릅니다. 조문객들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말을 낮추고, 걸음을 늦추고, 표정을 가다듬습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사람에게도 눈을 맞추고, 평소라면 꺼내지 않았을 말을 꺼냅니다. "살아있을 때 더 잘해줄 걸." "나도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 있겠어." 그 공간에서 사람은 잠깐, 진짜 사람이 됩니다.
반면 결혼식장을 생각해보십시오. 들뜬 음악, 넘치는 음식, 환한 조명,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서로의 옷차림을 훑어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어김없이 비교가 따라옵니다. '저 사람 식장은 저렇게 크던데.' '우리 아이 결혼은 언제쯤이나….' 잔치는 끝났지만 마음은 더 소란해집니다.
솔로몬은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그가 이 말을 쓸 때, 그는 이미 수백 번의 잔치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열왕기상의 기록에 따르면 솔로몬에게는 후궁 칠백 명에 첩 삼백 명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계산해도 거의 매일 어딘가에서 잔치가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 화려한 연회의 세월 끝에, 노년의 솔로몬이 쓴 글이 바로 전도서입니다.
그는 허무를 알았습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가 초상집이 잔칫집보다 낫다고 쓴 것은 도덕 교과서의 문장이 아니라, 잔치의 끝을 직접 살아낸 사람의 고백이었습니다. 지혜는 종종 이렇게 옵니다. 가장 많이 누린 사람이, 결국 그 누림의 공허함을 가장 선명하게 증언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4세기의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이 본문을 설교하면서 두 공간을 이렇게 대비했습니다. 잔칫집에서 돌아온 사람은 자기 집이 초라하게 보입니다. 밥상이 성에 차지 않고, 아내가 불만스럽고, 아이들이 거슬립니다. 남의 풍요가 자신의 가난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면 초상집에서 나온 사람은 다릅니다. 차가워진 몸으로 누워있는 고인을 보고 나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달리 느껴집니다. 집에 돌아와 밥상 앞에 앉을 때, 마주 앉은 가족의 얼굴이 달리 보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도 약한 존재인걸." 1600년 전의 설교지만, 오늘도 그대로입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일은 비단 신앙의 영역만이 아니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 한 명을 행렬 뒤에 세워 큰 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합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군중의 환호 속에서도 그 소리만은 귀를 파고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소리보다 환호를 더 오래 기억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거듭 무너지는 이유 중 하나는, 죽음보다 잔치를 더 오래, 더 깊이 마음에 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대문 밖에 나사로가 쓰러져 있어도, 개들이 그 상처를 핥는 것이 보여도, 잔치는 계속되었습니다. 나사로는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로 연명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답은 명확했습니다. 부자는 복 받은 사람이고, 나사로는 저주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말대로, "모든 사람의 끝"이 찾아왔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날은 아니었지만,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가는 그 길입니다.
그리고 죽고 나니, 세상이 뒤집혔습니다. 부자는 음부의 고통 속에서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나사로를 보내 손가락 끝의 물 한 방울만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한때 자기 대문 앞에 쓰러진 거지에게 말입니다. 이제 그는 그에게 물 한 방울을 구걸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진짜 순서가 드러났습니다.
다윗은 죽음을 앞두고 아들 솔로몬을 불러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그는 자신의 죽음을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라고 불렀습니다. 화려한 왕의 임종이 아니라, 평범한 한 인간의 끝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들에게 전한 것은 영토도, 재물도, 전략도 아니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라."
그러나 솔로몬은 그 유언을 받고도, 결국 잔칫집으로 마음이 갔습니다. 천 명의 여인들과의 연회 속에서 그 마음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지혜로운 말을 가장 많이 남긴 사람이, 정작 자신의 말대로 살지 못한 비극입니다.
전도서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 여기서 '이름'은 명성이나 평판이 아닙니다. 히브리적 사유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전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 사람이 무엇이었는가? 어떻게 살았는가?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그 이름의 최종 평가는 세상이 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십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의 냄새로,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로 맡혀집니다. 좋은 향기란 진한 향기입니다. 희석되지 않은 향기입니다. 복음이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그 냄새는 더 뚜렷해집니다.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는 향기는 이미 섞인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이 죽음을 마음에 두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단순히 허무함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인생의 유한함을 통해, 그 너머에 있는 영원한 현실을 붙잡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다른 모든 죽음과 다릅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지신 죽음이었습니다. 그 죽음이 죄를 용서하고, 그 부활이 의롭다 하심의 선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사람은, 죽음이 더 이상 공포로만 다가오지 않습니다. 솔로몬의 말처럼,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고생의 종점이며 안식의 시작이고, 생명의 부활로 나아가는 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하는 집입니까, 아니면 모든 사람의 끝을 생각하는 초상집입니까?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삶을 음울하게 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끝을 알기에, 지금을 제대로 살라는 말입니다. 죽음을 기억하기에, 살아있는 오늘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이 말은 공포의 선언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초청입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도서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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