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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전도서

전도서 - 채울 수 없는 갈망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19.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살아 있는 자들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에게는 무슨 유익이 있는가.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전도서 6:7~12)

어느 날 밤, 한 남자가 편의점 앞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막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지갑에는 이번 달 성과급이 들어 있었고, 오늘 상사에게 칭찬도 들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꽤 잘 풀린 하루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상하게 공허했습니다. 편의점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다인가? 그 공허함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전도서 6장은 그 공허함에 이름을 붙입니다.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7절) 히브리어로 식욕을 뜻하는 단어는 '네페쉬'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단순히 먹고 싶다는 욕구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네페쉬는 인간 전체를, 인간의 모든 갈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배고픔, 인정받고 싶음, 사랑받고 싶음, 무언가를 이루고 싶음, 지배하고 싶음, 기억되고 싶음, 이 모든 것이 네페쉬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다시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사람의 모든 수고는 자신의 갈망을 위함이나, 그 갈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우리 몸의 세포는 약 60조 개라고 합니다. 그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동안 에너지를 요구합니다. 음식을 아무리 먹어도 몸은 또 달라고 합니다. 배가 부르면 이번엔 마음이 허기를 느낍니다. 마음이 채워지는 듯하면 또 다른 결핍이 고개를 듭니다. 욕망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며 이어집니다. 가난한 시절에는 밥 한 끼면 충분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밥이 해결되면 옷이 문제가 되고, 옷이 해결되면 집이 문제가 되고, 집이 해결되면 인정이 문제가 됩니다. 인간의 갈망은 끝이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 손을 뻗은 순간부터 인간은 이 갈망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말에 넘어간 그 순간, 인간은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졌습니다. 생명에서 끊어진 존재는 이제 생존의 갈망만으로 달려갑니다. 불나방이 불을 향해 달려들듯,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욕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자화상입니다.

그런데 전도서는 이 갈망을 채우기 위해 지혜롭게 사는 것이 해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8절은 묻습니다. "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세상의 이치를 꿰뚫고, 살아가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라 해도, 채울 수 없는 갈망 앞에서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지혜는 삶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삶의 공허함을 채워주지는 못합니다.

여기서 전도서는 뜻밖의 말을 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9절) 새번역은 이렇게 옮깁니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욕심에 사로잡혀서 헤매는 것보다 낫다." 손에 쥔 것으로 만족하라는 말입니다. 마음속에 그려놓은 더 크고 더 빛나는 무언가를 향해 끝없이 달려가는 것보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을 감사히 누리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마저도 헛되다고 합니다. 이것이 전도서의 솔직함입니다. 자족도 처방전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크게 유행했던 이른바 '
사차원 영성'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마음으로 상상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는 말씀이 그 근거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인간의 욕망이 실현된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직 오시지 않은 그분을 믿음으로 붙든 성도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포장지 안에 인간의 탐심을 집어넣은 것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10절은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당신은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따질 수 없습니다(이사야 29:16, 로마서 9:21). 인간의 형편과 처지는 우리가 설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시대에 태어날지, 어느 가정에 태어날지, 어떤 몸을 받을지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배역을 끊임없이 원망하거나, 다른 배역을 탐냅니다.

한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의 동창 중에 SNS 프로필에 이런 말을 써 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
공평한 하늘 아래 하찮은 배역은 없다." 그는 이른바 명문대를 나왔지만, 졸업 후 몹시 어려운 형편에서 힘든 일을 해야 했습니다. 동기들이 지나다가 그 모습을 보아도 그는 한 번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가장 어렵게 살지만, 누구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준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보니까, 그 친구가 자족하면서 사는 사람이더라고요."

그 자족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자신의 배역이 크신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믿음, 토기장이가 빚으신 그릇이라는 확신, 그것이 자족의 근거가 됩니다.

11절은 우리 시대를 찌릅니다. "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말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히브리어 '드바림'은 말, 일, 선언, 규례를 모두 아우르는 단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말의 홍수 속에 삽니다. 유튜브, SNS, 개인 방송, 실시간 뉴스. 하루에도 수억 개의 말들이 쏟아집니다. 그 말들이 단 한 생명을 살릴 수 있을까요?

전도서는 말이 많아질수록 헛말도 많아진다고 합니다. 설교도 말입니다. 한 교회에서 20년을 설교했다 해도, 그것이 사람의 말이라면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헛소리일 뿐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고린도전서 1:13). 모든 말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에게로 모여야 합니다. 그 말만이 헛말이 아닙니다.

12절은 마지막 질문을 던집니다. "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짧고 덧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누가 알겠는가?" 어느 목사님께서 입관 예배를 드렸습니다. 삼일 전만해도 목사님을 알아보시던 분이었습니다. 이틀 전부터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더니 어제 밤에 눈을 감으셨습니다. 아내와 자녀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이 관 앞에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감긴 눈과 닫힌 입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평생 그분이 관심을 두고 살았던 것들이, 이제 그분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재물이든 명예든 걱정이든 소원이든, 그것들이 그분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요?

그림자입니다. 전도서는 우리의 인생을 그림자라고 부릅니다. 그림자에게 실체가 와야 합니다. 실체 없는 그림자는 빛이 꺼지면 그냥 사라집니다. 시므온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께서 그에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그는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누가복음 2:29~30)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품에 안았기 때문입니다. 채울 수 없는 갈망을 채우려 허덕이는 것이 아니라, 갈망의 끝에 계신 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오셔서 십자가로 모든 것을 이루셨고,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시므온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
네페쉬',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그 갈망을 채우려는 수고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 지혜도, 자족의 의지도, 말의 풍성함도 그 독을 채우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독의 밑바닥을 막으실 수 있는 분이 오셨습니다. 생명에서 끊어진 인간에게 생명 자체가 오셨습니다. 그림자에 실체가 오셨습니다. 허무한 그림자 같은 인생살이 한가운데서, 이 복음이 들려지고 믿어지는 은혜는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