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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전도서

전도서 - 지혜의 그늘 아래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8.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매한 자들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전도서 7:5~12)

어느 대학원생이 지도교수 앞에 논문 초안을 들고 갔습니다. 몇 달을 쏟아부은 결과물이었습니다. 교수는 논문을 펼쳐 읽더니 조용히 빨간 펜을 들었습니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여백이 빨갛게 채워졌습니다. 학생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옆 연구실 친구는 달랐습니다. 그 친구의 지도교수는 논문을 받아들고 "
정말 잘 썼어, 거의 완벽해"라고 말했습니다. 두 학생 중 누가 더 좋은 논문을 완성하였을까요? 일 년 뒤 답은 분명해졌습니다. 빨간 펜 세례를 받은 학생이 저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였습니다. 칭찬만 받은 학생의 논문은 심사에서 계속 탈락하였습니다. 전도서 7장 5절은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낫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칭찬받기를 원합니다. SNS에 글을 올리면 비판 댓글보다 '
좋아요'를 기다립니다. 발표를 마치면 "잘했어"라는 말 한마디에 안도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전도서는 이 본성의 반대 방향을 가리킵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웃음소리, 즉 근거 없는 칭찬과 격려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와 같다고 합니다(6절). 가시나무는 불이 붙으면 요란하게 탁탁 소리를 냅니다. 그러나 금방 꺼집니다. 온기도 없고, 음식도 익히지 못하고, 연기만 피어오를 뿐입니다. 우리가 듣기 좋아하는 칭찬이 바로 그것입니다. 순간 기분을 달아오르게 하지만, 우리를 성장시키지 않고, 진실을 보게 하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성경이 하는 일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네 가지 중 우리가 반기는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교훈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전제하고, 책망은 내가 틀렸다는 것을 전제하며, 바르게 함은 내가 구부러져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에게 "너는 스스로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읽으면서 그 책망이 들리고 마음에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이미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7절이 경고합니다. "
탐욕은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고, 뇌물은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월스트리트의 수많은 수재들이 파생상품 거품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계속 그 게임을 하였습니다. 왜였을까요? 수수료와 보너스, 즉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지식은 있었으나 탐욕이 그 지식을 마비시켰습니다. IQ가 높다고, 학위가 많다고 탐욕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 그날 전 세계에 증명되었습니다. 전도서가 수천 년 전에 이미 한 말입니다.

더 일상적인 예를 들어보면, 어떤 사람이 친구의 SNS를 보다가 그 친구가 새 차를 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갑자기 자신의 차가 초라해 보입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만족하였던 차였습니다. 비교와 탐욕이 지혜를 잠식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의 판단은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무리한 할부를 감당하면서까지 차를 바꾸거나, 친구를 시기하며 관계를 스스로 무너뜨리게 됩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오늘날에도 인기를 끄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의 탐욕을 건드리는 메시지는 언제나 청중을 모읍니다. "
당신은 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부유하게 하기를 원하신다." 솥 밑에서 타오르는 가시나무 소리처럼 요란하고 화려하지만, 그 불꽃이 꺼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8~9절이 말합니다. "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왜 사람은 분노합니까? 일이 자기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입니다. 내가 기대한 결론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을 때, 참지 못하고 화를 냅니다. 육아 중인 부모가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는 순간, 연인이 사소한 말다툼에서 참지 못하고 폭언을 하는 순간, 직장인이 회의실에서 감정을 폭발시키는 순간이 모두 같은 구조입니다. "이 일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 그리고 그 불안 뒤에 숨어 있는 자기중심성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을 수 있습니까? 전도서가 주는 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끝을 알면 됩니다. 그런데 그 끝이란 내 일의 결론이 아니라 세상의 끝, 역사의 끝을 아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8절은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려지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두 번째 나타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의 끝은 더 분명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
이루었도다"라는 선언, 알파와 오메가 되신 그분이 이미 역사의 결론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끝을 아는 사람은 오늘의 불완전한 결과에 분노하지 않습니다. 마라톤 완주자가 42킬로미터 지점에서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은 결승선을 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신 그 끝을 믿는 사람은, 자신이 시작한 일이 이 세상에서 아무 결실 없이 조용히 사라진다 해도, 분노하거나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10절이 경고합니다. "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종종 이런 글들이 올라옵니다. "요즘 세상은 왜 이래. 예전이 훨씬 살기 좋았는데." 혹은 반대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가 내 전성기였어." 두 가지 모두 현재의 결핍이나 실패를 과거의 영광으로 덮으려는 심리입니다.

그런데 전도서는 이런 질문 자체가 지혜롭지 않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해 아래 새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구조 자체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탐욕도, 어리석음도, 죽음도, 시간의 흐름도 말입니다. 과거로 돌아간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지혜는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끝을 알고 사는 것입니다.

11~12절에서 전도서는 두 가지 그늘을 제시합니다. 돈의 그늘과 지혜의 그늘입니다. "
돈이 사람을 보호하듯, 지혜도 사람을 보호한다. 그러나 지혜를 깨우쳐 아는 지식이 더 좋은 까닭은, 지혜가 그 사람의 목숨을 살려 주기 때문이다." 돈의 그늘이 얼마나 실질적인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가 누구보다 잘 압니다.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쓰이는 시대입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는 것, 좋은 유산을 물려받는 것이 인생의 출발선 자체를 바꾼다는 것을 누구나 체감합니다. 돈의 그늘은 실재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지혜의 그늘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왜입니까? 돈의 그늘은 목숨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부유한 사람도 결국 죽습니다. 아무리 좋은 보험에 들어도, 아무리 좋은 병원에 가도, 죽음 앞에서 돈의 그늘은 걷혀버립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린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
산다'는 것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삶이 진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노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시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며 살았습니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노아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방주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시선으로 보면 노아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가 왔을 때, 누가 지혜의 그늘 아래 있었는지가 드러났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은 선언합니다.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세상의 눈으로 보면 십자가는 실패입니다.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결말, 그러나 그것이 바로 세상의 끝이었고, 역사의 완성이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그 한 마디가 모든 것을 결론지었습니다.

지혜의 그늘 아래 산다는 것은 바로 이 십자가 아래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그 그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칭찬보다 책망을 들을 줄 알고, 탐욕보다 절제를 택하며, 급한 분노 대신 끝을 알기에 참는 삶입니다.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거나 현재의 결핍에 절망하지 않고, 이미 선포된 결론을 붙들고 사는 삶입니다.

이 지혜는 스스로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산처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것을 상속받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혜의 그늘 아래 머물기를 소원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증거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그분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