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약 말씀 묵상/전도서

손에 잡히지 않는 지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4.

"지혜가 지혜자를 성읍 가운데에 있는 열 명의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이미 있는 것은 멀고 또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연구하여 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얼마나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마음은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은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더 쓰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내었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 여인을 피하려니와 죄인은 그 여인에게 붙잡히리로다. 전도자가 이르되 보라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연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내 마음이 계속 찾아보았으나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천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내가 찾았으나 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하였느니라.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전도서 7:19~29)

작은 마을에 평생 책을 읽어온 노인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지혜롭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철학책을 읽고, 인생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하고, 명상 수련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혜를 좇으면 좇을수록 오히려 지혜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손으로 안개를 움켜쥐려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는 결국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
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고 그토록 애썼는데, 지혜는 나를 계속 피해 다녔다." 이 노인의 이야기는 사실 3천 년 전 어느 왕의 고백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바로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직접 지혜를 선물로 받은 사람입니다. 역사상 그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전도서 7장에서 털어놓는 고백은 뜻밖입니다. "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새 번역으로 읽으면 더 생생합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결심해 보았지만, 지혜가 나를 멀리하더라."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지혜를 받은 사람이, 그 지혜로 지혜를 다시 찾아 나섰는데, 오히려 지혜가 그를 피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역설이 숨어 있습니다. 지혜를 "
내가 소유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지혜는 더 이상 지혜가 아니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 주인공이 지혜가 아니라 ""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내 손아귀에 넣고 휘두르려는 순간,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나의 도구, 나의 소유물, 나의 자랑거리로 전락합니다.

사무엘하 20장에는 이와 대조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반역자 세바가 아벨성으로 도망쳐 들어가고, 요압 장군이 성을 무너뜨리려 할 때, 이름도 없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스스로 지혜자라고 자처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지혜가 그녀를 통해 일했을 뿐입니다. 그녀의 말 한마디로 성 전체가 구원을 받습니다. 지혜의 주인공은 그 여인이 아니라 지혜 그 자체였습니다.

솔로몬은 또 하나의 통찰을 던집니다.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욕하는 말을 들으면 참을 수 없어 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인터넷 댓글 하나에 밤잠을 설치고, 악플 하나에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괴로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정곡을 찌릅니다. "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 여기서 '가끔'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실은 '자주, 여러 번'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어느 회사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동료가 자신을 뒤에서 험담했다는 소문을 듣고 몇 날 며칠을 분노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지난 몇 년간 얼마나 많은 사람을 뒤에서 흉보았는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기억입니다. 남이 나를 상하게 한 일은 오래도록 기억하면서, 내가 남을 상하게 한 일은 순식간에 잊어버립니다. 이 불균형한 기억 속에서 우리는 늘 자신을 피해자로, 세상을 가해자로 그려갑니다.

솔로몬은 전심을 다해 연구하고 살폈지만, 27~29절에서 결국 고백합니다. 천 사람 중에 지혜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 하나 찾기 어렵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은 이것입니다. "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단순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이 말은 인류 전체에 대한 진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하고 정직하게 지으셨는데, 우리 스스로 인생을 복잡하게 꼬아버렸다는 것입니다. 마치 처음에는 깨끗했던 실타래를, 스스로 자꾸 손을 대다가 엉망으로 엉켜버리게 만든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불안, 우리의 죄, 우리의 복잡한 인간관계는 대부분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의 결론은 절망일까요? 아닙니다. 신약은 이 실마리를 완전히 풀어줍니다.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그러면서 결론짓습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여기에 솔로몬이 발견하지 못한 답이 있습니다. 내가 지혜를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지혜 되신 그분이 나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이 지혜의 실체를 정확히 짚어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입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어리석고 미련해 보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원하고, 헬라인은 철학적 지혜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로 세상의 지혜를 무너뜨리셨습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자격증을 따고 스펙을 쌓아서 인정받으려 애썼는데, 정작 자신을 진짜로 사랑해준 사람은 아무 조건 없이 다가온 사람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애써 찾던 지혜는, 사실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솔로몬처럼 평생 지혜를 좇아도 사람은 결코 지혜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지혜는 소유물이 아니라 인격이며, 그 인격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지혜를 붙잡으려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지혜 되신 분 앞에 정직하게 무릎 꿇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말합니다. "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 그 모든 행하신 일이 곧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우리가 그 지혜를 찾아낸 것이 아니라, 그 지혜가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자녀들은 이제 더 이상 지혜를 움켜쥐려 애쓰지 않습니다. 다만 날마다 그 지혜 되신 주님 앞에 자신을 내어드릴 뿐입니다. 그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이며, 참된 지혜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