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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출애굽기

출애굽기 - 누룩 없는 삶, 무교절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방식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20.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너희에게 첫날에도 성회요 일곱째 날에도 성회가 되리니 너희는 이 두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각자의 먹을 것만 갖출 것이니라.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로 삼아 대대로 이 날을 지킬지니라. 첫째 달 그 달 열나흗날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이레 동안은 누룩이 너희 집에서 발견되지 아니하도록 하라 무릇 유교물을 먹는 자는 타국인이든지 본국에서 난 자든지를 막론하고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어지리니, 너희는 아무 유교물이든지 먹지 말고 너희 모든 유하는 곳에서 무교병을 먹을지니라."(출애굽기 12:15~20)

시골 외할머니 댁에는 오래된 장독대가 있었습니다. 매년 봄이 되면 할머니는 장독 안의 묵은 된장과 간장을 살피셨습니다. 신기한 것은, 아무리 좋은 재료로 담근 장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안에서 원하지 않는 곰팡이나 이상한 냄새가 올라올 때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할머니는 주저 없이 그 부분을 걷어내셨습니다. “
장독 하나 잘못되면 온 장독대가 다 버려진다.” 어린 제게는 그 말이 유난히 무섭게 들렸습니다. 작은 균 하나가 결국 온 항아리를 못 쓰게 만든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왜 하필 “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물었는지, 저는 그 장독대 앞에서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누룩은 작습니다. 눈에 잘 띄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한번 반죽 속에 들어가면 손쓸 틈도 없이 온 덩이를 부풀리고 변질시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을 출애굽기 12장 15~20절의 무교절 규례는, 바로 이 “작지만 치명적인 누룩”에 관한 하나님의 경고이자, 동시에 그 누룩을 완전히 제거해버리신 한 분에 관한 복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신 후, 곧바로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 곧 무교병을 먹으라고 명하셨습니다.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15절). 왜 유월절 하루로 끝내지 않으시고, 굳이 이레라는 시간을 더하셨을까요?

성경에서 이레는 완전함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언약의 수입니다. 다시 말해 이 무교절은 단순히 일주일간의 특별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완전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살아내는 훈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훈련의 핵심은 아이러니하게도 “
아무 것도 넣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누룩을 넣지 않은 빵, 즉 무교병의 히브리어 ‘맛차’는 본래 달콤하고 향긋한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무교병을 먹어본 사람은 압니다. 부풀지 않은 빵은 딱딱하고 밍밍합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이를 “
고난의 떡”이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겉보기엔 초라하지만 그 안에 아무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순전한 양식이었습니다.

이 본문을 오늘 우리에게 살아있는 말씀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열쇠는, 예수님께서 친히 누룩을 무엇이라 해석하셨는가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제자들이 떡을 챙기지 못해 걱정할 때, 예수님은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엔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오해했지만, 곧 예수님이 말씀하신 누룩이 “그들의 교훈”, 곧 율법을 행위로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심 깊고 경건해 보이는 그 가르침이, 사실은 은혜의 복음을 서서히 부풀리고 변질시키는 누룩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누룩은 대개 밖에서 온 노골적인 악이 아니라, 안에서 자라나는 그럴 듯한 의의 모습을 하고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잘 담근 장독 안에서도 곰팡이가 피어나듯,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
내가 이만큼 했으니”, “내가 이 정도는 지켰으니”라는 미묘한 자기 의의 누룩이 마음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부풀어 오를 수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정작 무너지는 성도들이 처음부터 세상적이고 방탕했던 분들보다, 오랫동안 신실하게 봉사하다가 문득 “내가 이만큼 헌신했는데 왜 하나님은…”이라는 마음의 균열에서 시작되는 경우를 자주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의 누룩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누룩을 스스로 걷어낼 수 있을까요? 할머니가 장독의 곰팡이 핀 부분을 손으로 걷어냈듯, 우리도 마음의 결심과 노력으로 죄의 누룩을 걷어낼 수 있을까요? 성경의 답은 단호합니다.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5장 7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 문장의 시제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룩을 제거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희생되셨다는 완료된 사실이 먼저 선포됩니다.

무교절의 진짜 주인공은 우리의 정결한 노력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완전히 부서지신 어린 양이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
누룩 없는 생명의 떡”이 되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분 안에는 어떤 죄의 곰팡이도, 어떤 자기 의의 부풀림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오직 그분만이 온전히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는 명령의 히브리어 ‘샤바트’는 본래 ‘그치다, 안식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더 열심히 누룩을 찾아 제거하라”는 노동의 명령이 아니라, 오히려 “네 힘으로 애쓰던 것을 그치고 쉬라”는 안식의 초대입니다. 마치 오랫동안 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사람이 마침내 바닥에 발이 닿았을 때 몸에 힘을 빼도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더 이상 스스로 정결해지려 몸부림치지 않아도 되는 안식의 자리를 열어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안식이 우리를 나태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무교절 규례는 “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각자의 먹을 것만 갖출 것”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먹을 것”은 다름 아닌 어린 양의 살과 피, 곧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 날마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그 시골 장독대에서, 할머니가 곰팡이를 걷어내신 후 다시 정성껏 장독 뚜껑을 덮으시던 모습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 죄의 누룩을 완전히 제거해 주셨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매일 그 은혜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뚜껑을 덮듯 그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다시 “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이루셨는가”를 먹고 사는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회란 결국 이런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자기 의의 누룩을 걷어내고 오직 어린 양의 피만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자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그런 삶을 잃어버린 공동체를 “
사탄의 회당”, “니골라 당”이라 아프게 지적합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신앙의 언어를 쓰지만 속에서는 인간의 계명과 자기 노력의 누룩이 온 덩이를 부풀리고 있는 상태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무교절이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 신앙의 장독 안에는 지금 무엇이 부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은혜입니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자라난 자기 의의 곰팡이입니까? 누가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그토록 원하셨던 그 식탁에, 오늘 우리도 아무 것도 가져갈 것 없이, 오직 그분이 이루신 것만을 받아먹기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린도전서 5: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