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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출애굽기

출애굽기 - 문설주에 발린 피, 첫 유월절 이야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26.

출애굽기 12장 21~36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출애굽기 12:23,27)

애굽의 마지막 밤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단순했습니다. "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잡고, 그 피를 우슬초에 적셔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발라라."

여기서 잠깐 멈추어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왜 하필 "
장로"들을 부르셨을까요? 히브리어로 장로는 '자켄', 곧 '늙은 사람, 옛사람'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너희 옛사람은 심판받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너희를 언약 안에서 새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구원이란 그저 애굽 땅을 벗어나는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옛사람이 죽고 언약의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한 성도가 오랜 중독의 습관에서 벗어나려 애쓰다가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
저는 매번 결심만 하고 다시 무너집니다. 제 힘으로는 옛 습관을 죽일 수가 없어요."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의 결심이나 의지가 아니라, 오직 어린 양의 피만이 그들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문에 피를 바를 때 쓰인 도구는 화려한 제사 기구가 아니라 우슬초, 곧 담벼락 틈에서나 자라는 하찮은 들풀이었습니다. 열왕기상에서는 "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라는 표현으로 가장 귀한 것과 가장 하찮은 것을 함께 언급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백향목 같은 자든 우슬초 같은 자든, 오직 어린 양의 피 안에서만 정결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흥미롭게도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직전,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바로 이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댔다고 기록합니다. 죄 없으신 완전한 의인이신 예수님이 가장 하찮은 죄인의 자리까지 스스로 낮아지셔서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밧세바 사건 이후 나단 선지자 앞에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그는 자신이 백향목이 아니라 우슬초 같은 존재임을, 오직 그 하찮음 위에 부어지는 피로만 살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어느 큰 회사의 회장이든, 이름 없는 시장 상인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다 같은 우슬초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우리의 지위나 노력이 아니라, 우리 위에 발라지는 어린 양의 피뿐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피는 문의 좌우 기둥과 인방에는 발랐지만, 문지방에는 바르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어린 양을 문 앞, 곧 현관에서 잡았기 때문에 이미 문지방에는 피가 있었을 것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피가 발린 문을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안전선과 같습니다. 태풍이 몰아치는 밤, 방파제 안쪽에 머무는 배는 안전하지만 그 선을 넘어 바다로 나가는 배는 위험에 노출됩니다. 어린 양의 피가 그어놓은 경계선 안에 머무는 것, 그것이 곧 믿음의 삶입니다. 문을 벗어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다른 길, 곧 율법적 행위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은혜의 복음을 떠나 자기 의로 하나님 앞에 서려는 모든 시도가 바로 그 문밖으로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에서 "지나가실 때"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아바드', 곧 '일하다, 섬기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얼핏 보면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시는 무서운 장면 같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해 섬기시는 사랑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오해 하나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흔히 "
이스라엘이 문에 피를 발랐으니, 그 순종의 행위가 있어야 구원이 완성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사람의 순종이 아니라 피입니다. 피는 곧 죽음의 표시입니다.

그 집은 이미 다 죽은 집, 곧 자기 행위로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오직 어린 양의 피로 덮였기에 하나님의 집이 된 것입니다. 한 어머니가 위독한 아기를 안고 응급실로 뛰어 들어갔던 이야기입니다. 그 순간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부모였는지 증명하는 서류가 아니라, 그저 의사의 손이었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문에 피를 바른 것조차, 사실은 하나님이 미리 마련해주신 어린 양과 명령을 그대로 따른 것일 뿐, 그들 자신의 공로가 될 수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의 말씀처럼, 인자가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하심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시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었습니다. 유월절은 바로 그 대속의 섬김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
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하나님은 이 유월절 예식을 단회적 사건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대대로 자녀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자녀"는 정확히는 "아들"입니다. 언약의 역사는 아들을 만들어가는 역사이며, 그 계보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집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유월절의 은혜를 들려줄 때, 그 자녀는 역사적으로 애굽 땅에서 살지 않았어도 동일한 구원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마치 오늘 우리 자녀들이 이천 년 전 십자가 현장에 있지 않았어도, 부모의 신앙 고백과 말씀 교육을 통해 그 십자가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한 신앙의 가정에서 할머니가 손주에게 "
예수님이 너를 위해 죽으셨단다"라고 매일 밤 되풀이해서 들려준 이야기가, 훗날 그 아이의 인생을 바꾸는 씨앗이 되었다는 간증을 우리는 종종 듣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 순간, 부모는 하나님의 일을 대신 감당하는 자가 됩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공경받을 자격은 그들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언약의 말씀을 전해주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밤중에 하나님은 애굽 땅의 모든 처음 난 것을 치셨습니다. 왕궁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죄수의 장자, 심지어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 밤 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 죽임을 당하지 않은 집이 하나도 없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나 같은 밤, 같은 하늘 아래, 피가 발린 이스라엘의 집들은 고요했습니다. 같은 재앙, 같은 심판의 밤이었지만 결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더 도덕적이었거나, 더 신앙이 좋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문에 발린 피, 그것 하나의 차이였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심판 날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그날 온 세상에 통곡이 있을 것이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덮인 자들에게는 심판이 넘어갈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이나 종교적 열심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만이 우리를 그 밤의 통곡에서 건져냅니다.

애굽 사람들은 "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었다"며 이스라엘을 재촉하여 내보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발효되지 못한 반죽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고 서둘러 떠났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은 빈손으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였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입히셔서 구하는 대로 다 얻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오래전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미리 약속하신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노예로 끌려온 이들이 종살이의 대가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풍성히 채움을 받아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마치 빚에 눌려 파산 직전까지 몰렸던 사람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빚을 청산받고 오히려 새 출발의 밑천까지 손에 쥐고 걸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참된 의미를 다시 확인합니다. 구원은 단지 지옥에서 건짐받는 소극적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얼마나 풍성하게 채우시고, 그 백성을 통해 자신의 위대하심을 드러내시는가 하는 적극적 사건입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들의 눈에 위대하게 보이게 하신 것도, 결국 모세가 가리키는 참된 언약의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날 밤 이스라엘의 모든 것은 그들의 순종이나 준비성이 아니라, 오직 문설주에 발린 피 하나에 달려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이 던져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서 있습니까. 나의 신앙 경력, 나의 봉사, 나의 도덕적 성취입니까, 아니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입니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그림자였고, 그 실체는 요한복음이 증언하듯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닿았던 신 포도주, 그리고 그분이 흘리신 보혈이었습니다. "
다 이루었다" 하시고 숨을 거두신 그 순간, 온 인류를 위한 참된 유월절이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설주에 발려야 할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그 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