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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출애굽기

출애굽기 - 어둠 속에 찾아오시는 하나님, 장자 죽음의 이적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리라 그가 너희를 내보낼 때에는 여기서 반드시 다 쫓아내리니, 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따르는 온 백성은 나가라 한 후에야 내가 나가리라 하고 심히 노하여 바로에게서 나오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기적을 더하리라 하셨고, 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적을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출애굽기 11:1~10)

어느 등산가가 히말라야의 한 봉우리를 오른 적이 있습니다. 아홉 개의 캠프를 지나오는 동안 눈보라와 산소 부족, 체력의 한계와 싸웠습니다. 그런데 정상을 코앞에 둔 마지막 구간, '데스존'이라 불리는 그 지점에서 많은 사람이 포기하거나 목숨을 잃습니다. 가장 짧은 거리가 가장 무거운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1장은 바로 그 '마지막 캠프'에 해당하는 본문입니다. 아홉 가지 재앙이 애굽 땅을 훑고 지나갔습니다. 피, 개구리, 이, 파리, 가축의 죽음,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그런데도 바로의 마음은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마지막 한 가지, 열 번째 재앙을 예고하십니다. 장자의 죽음입니다.

본문은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짧은 문구 속에 담긴 뜻은 깊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모세라는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고 이적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모세 개인의 위대함이 아닙니다.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는 말씀은, 모세가 스스로 높아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통로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한 회사에서 신입사원이 큰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그 신입사원을 칭찬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 프로젝트의 설계도를 그린 것은 대표였고, 신입사원은 그 계획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입니다. 진짜 주인공은 무대 뒤에 있습니다. 모세도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우리는 자꾸만 무대 위의 배우에게 눈길을 빼앗깁니다. 모세의 리더십, 모세의 믿음, 모세의 용기를 배우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진짜 가리키는 곳은 무대 뒤,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과 그 언약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라고 명하십니다. 얼핏 보면 노예로 부려먹힌 대가를 챙기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
"(케세프)은 생명의 값으로 치르는 돈을, ""(자하브)은 변하지 않는 진리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이 구해야 했던 것은 단순한 재물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대속의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빚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빚을 청산받는 날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가 그날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통장에 찍힌 숫자가 아니라, 자신을 그 빚에서 풀어준 사람의 마음, 그 관계 자체일 것입니다. 은금 패물은 껍데기이고, 그 안에 담긴 진짜 알맹이는 하나님이 베푸신 대속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꾸 껍데기, 곧 눈에 보이는 축복과 형통을 구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입니다.

"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이 말씀은 소름 끼치도록 담대합니다. 천사나 대리자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친히 애굽 땅에 들어가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소방관이 불타는 건물에 부하 대원을 먼저 들여보내지 않고 자신이 직접 뛰어들어가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지휘관이 직접 현장에 뛰어드는 순간, 그것은 이 일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신호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밤중에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신다는 것은, 이 심판이 대리로 처리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성품과 직결된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밤중'이라는 시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와 어둠이 가장 깊어지는 시간,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시간에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우리 삶에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은밀한 어둠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밤중에, 우리의 가장 깊은 곳까지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열 번째 재앙의 대상은 장자입니다. 히브리어 '베코르'는 초태생, 우두머리, 처음 난 자를 뜻합니다. 왕궁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서 밤새 곡식을 갈던 여종의 장자까지, 신분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모두가 심판 아래 놓입니다.

왜 하필 장자일까요? 장자는 그 집안의 힘과 자랑, 계승의 상징입니다. 시편은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들의 기력의 처음 것을 치셨으나"(시 78:51)라고 말합니다. 장자를 친다는 것은,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자랑으로 삼는 것, 곧 자기 힘과 자기 의를 꺾으신다는 뜻입니다.

어느 마라톤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의 우승 기록을 평생 자랑거리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무릎 수술을 받게 되고, 다시는 달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습니다.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던 다리, 그의 정체성의 근원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그 이후에야 비로소 달리기가 아닌 다른 것들인 가족, 신앙, 다른 사람을 돕는 삶에서 진짜 의미를 발견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장자의 죽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혈통, 가문, 학벌, 업적, 자기 의라는 '장자'가 죽어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사는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를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3)

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부르짖음이 있을 때,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심판의 아우성이 담을 넘어 들려오는 그 밤, 이스라엘의 집 안은 고요합니다.

전쟁 중 폭격이 쏟아지는 도시에서, 어느 한 지역만 유독 방공호가 튼튼하게 지어져 그 안의 사람들은 폭발음을 듣고도 평안히 잠들 수 있었다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생사가 갈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애굽 사이의 이 극명한 대조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평온함은 이스라엘이 애굽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진 자가 이스라엘이고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 자가 애굽이다." 아벨, 셋,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택하신 것도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우리의 자격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본문은 바로가 결국 모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고로 끝맺습니다. 그토록 많은 이적을 보고도 바로의 마음은 완악해집니다. 여기서 '기적'(모페트)이라는 단어는 본래 '언약의 표'를 뜻하지만, 바로에게는 그저 신기한 눈요깃거리에 불과했습니다.

마치 명의가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내려도, 환자가 그 처방을 믿지 않고 계속 민간요법만 찾아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이미 다른 것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표적들을 수없이 목격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언약의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저 신기한 사건 정도로만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1장은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나는 밤을 그립니다. 애굽에게는 통곡의 밤이지만,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문턱에 선 밤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과 구원을 가르는 유일한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도 '밤중'이라 부를 만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상실,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어둠의 시간. 그러나 그 밤중에도 하나님은 친히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던 '장자', 곧 스스로 자랑하던 것들이 꺾이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우리는 은과 금보다 귀한 진리,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게 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