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화덕의 재 두 움큼을 가지고 모세가 바로의 목전에서 하늘을 향하여 날리라. 그 재가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되어 애굽 온 땅의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서 악성 종기가 생기리라. 그들이 화덕의 재를 가지고 바로 앞에 서서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날리니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 악성 종기가 생기고, 요술사들도 악성 종기로 말미암아 모세 앞에 서지 못하니 악성 종기가 요술사들로부터 애굽 모든 사람에게 생겼음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출애굽기 9:8~12)
몇 해 전, 건강검진에서 아무 이상 없다는 판정을 받고 안심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 피부에 작은 종기 하나가 돋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 방치했다가 결국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온몸에 퍼진 뒤였습니다.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것과 실제로 건강한 것은 다릅니다. 종기는 몸이 보내는 마지막 신호였어요." 애굽에 내려진 여섯째 재앙, 악성 종기의 이적은 바로 이 진단서와 같습니다. 사람과 짐승의 몸에 퍼진 종기는 단순한 피부병이 아니라, 애굽 전체가 이미 죽음의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진단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화덕의 재 두 움큼을 가지고 바로 앞에 섭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그것을 날립니다. 왜 하필 화덕의 재였을까요? 화덕, 히브리어로 '키브샨'은 금속을 녹이는 용광로를 가리키는 말이면서, 동시에 '짓밟다, 정복하다, 복종시키다'라는 뜻의 '카바쉬'에서 나온 말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땅을 정복하라"고 하실 때 쓰인 바로 그 단어입니다. 본래는 다스림과 축복의 언어였던 것이, 여기서는 심판의 도구로 뒤집혀 나타납니다.
마치 자녀를 사랑으로 훈육하려던 부모의 손이, 자녀가 끝내 돌이키지 않을 때는 엄중한 매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정복하시는 손길은 본래 사람을 다스려 그분의 형상으로 세우기 위한 것이었지만, 죄로 완악해진 인생 앞에서는 심판의 재로 변합니다. 그리고 그 재가 상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 자신입니다. "재"로 번역된 히브리어 '파아흐'는 그을음, 가루, 티끌을 뜻합니다. 불로 다 태우고 남는 것, 그것이 재입니다. 하나님은 이 재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정체는 불의 심판 앞에서 남는 한 줌의 재와 같다."
본문은 "두 움큼"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호펜 멜로', 두 손바닥에 가득 찬 분량입니다. 왜 굳이 양이 강조되었을까요? 한 중년의 성도가 은퇴를 앞두고 평생 모은 재산과 명예, 인간관계를 정리하다가 문득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다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손을 펴 보니 남은 게 없더군요." 두 손바닥 가득한 재는 우리가 평생 쌓아온 겉사람, 육신의 자아가 결국 태워지면 한 줌의 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재는 "목전에서", 곧 바로의 두 눈앞에서 뿌려집니다. 하나님은 멀리서 심판을 선포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의 실상을 눈으로 보게 하십니다. 마치 거울 앞에 서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도망갈 수 없도록, 부인할 수 없도록 말입니다.
재는 하늘을 향해 날려지지만, 결국 땅에 떨어져 온 애굽 땅의 티끌이 되고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 종기가 됩니다. 이 장면은 상징적입니다. 하늘로 올라가려 했던 것이 결국 땅으로 떨어지는 것, 이것이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늘에 닿으려 할 때 벌어지는 일입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 했지만, 결국 언어가 흩어지고 사람들은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늘을 향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땅에 떨어져 스스로를 괴롭히는 종기가 됩니다.
본문은 "애굽 온 땅의 사람과 짐승"이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인생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뜻입니다. 이 종기의 이미지는 신약에서 놀랍게도 다시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나사로입니다. 부자의 대문 앞에 헌데투성이로 버려진 거지 나사로, 그의 몸에 난 것이 바로 '헬코스', 종기입니다. 나사로는 애굽에 내려진 여섯째 재앙의 형상을 그대로 몸에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구원받은 것은 부자가 아니라 나사로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착각하기 쉽습니다. '나사로가 가난하고 고통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핵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나사로라는 이름 자체가 히브리어 '엘리에셀', 곧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뜻입니다. 나사로가 구원받은 것은 그가 가난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응급실에 실려 온 두 환자가 있는데, 한 사람은 "나는 건강하니 치료가 필요 없다"고 우기다 죽고, 다른 한 사람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살려달라"고 손을 내밀어 살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부자는 스스로 부유했기에 심판을 받았고, 나사로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손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그것이 나사로를 살렸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부자의 상으로, 이방 여인이 구했던 자비를 부스러기로 여겼습니다(마태복음 15장). 그러나 그 부스러기 같아 보이는 것, 사람들이 하찮게 여겼던 그 은혜가 실은 생명을 살리는 전부였습니다. 십자가도 그렇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약하고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지만, 종기와 나병 같은 저주 속에 있던 우리를 살리는 것은 다름 아닌 그 부스러기 같은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본문은 마지막에 이렇게 마칩니다.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다." 재로 뒤덮인 온몸의 종기를 눈으로 보고도, 바로는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죄가 죄로 드러나도, 사람은 스스로 회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에도 사람들이 종기의 고통 중에도 하나님을 비방하고 회개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진단만으로는 사람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병명을 알려준다고 병이 낫는 것이 아니듯 말입니다. 그러기에 회개마저도 은혜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재를 씻어낼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언약으로 찾아오셔야 합니다. 나사로에게 찾아오신 것처럼, 부스러기 은혜로 살리시는 것처럼, 우리의 종기 난 몸을 그대로 안아주시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눅 16:2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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