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가 개구리로 너의 온 땅을 치리라. 개구리가 나일강에서 무수히 생기고 올라와서 네 궁과 네 침실과 네 침상 위와 네 신하의 집과 네 백성과 네 화덕과 네 떡 반죽 그릇에 들어갈 것이며 개구리가 너와 네 백성과 네 모든 신하에게 기어오르리라."(출애굽기 8:1~4)
어느 해 여름, 한 신학교 강당에서 간증 집회가 열렸습니다. 단상에 오른 중년의 장로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습니다. "저는 십 년 동안 새벽기도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십일조를 성실히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사업을 축복하시고, 자녀들을 명문대에 보내주셨습니다." 박수 소리가 강당을 가득 채웠습니다. 청중의 눈빛엔 동경과 부러움이 가득했습니다. 누군가는 수첩에 무언가를 받아 적기까지 했습니다. 그 풍경은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날 강당을 가득 채운 소리를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의 울음이라고 부릅니다.
고대 애굽은 나일강을 신성의 근원으로 여겼습니다. 매년 강이 범람하고 물이 빠지면 땅은 기름진 퇴적층을 드러냈고, 그때마다 개구리 떼가 들판을 뒤덮었습니다. 애굽인들의 눈에 개구리는 생명과 다산의 전령이었습니다. 그들은 개구리 머리를 가진 여신 '헤케트'를 숭배했습니다. 개구리가 많을수록 풍요가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은 종교가 되고, 문화가 되고, 삶의 방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개구리를 재앙의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풍요의 상징이 땅을 뒤덮는 재앙이 된 것입니다. 왜그랬을까요? 히브리어 '체파르데아(개구리)'는 '차파르', 곧 '뛰어오르다, 울다'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개구리는 울기 위해 존재하는 동물입니다. 쉬지 않고 웁니다. 물과 땅을 쉼 없이 오갑니다. 입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레위기는 지느러미도 비늘도 없는 수중 생물을 "가증한 것"으로 선언했습니다. 지느러미가 없으면 방향을 잡지 못합니다. 비늘이 없으면 보호받지 못합니다. 말씀 안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말씀의 보호 밖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울어대는 것이 개구리의 본질적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15:18). 요한계시록 16장은 그 더러운 입을 세 곳에서 발견합니다. 용의 입, 짐승의 입, 거짓 선지자의 입, 그리고 그 세 입에서 나오는 것이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입니다. 이 세 입은 사실 하나입니다.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는 것, 아니 더 정확하게는 예수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인간의 자기 의를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먹지 못하여 방향을 잃었으면서도 끊임없이 울어댑니다. 마치 하늘을 향해 뛰어오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진리가 아닌 것을 먹고 비진리를 토해내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자크 엘륄은 그의 저서에서 현대 사회를 "말의 홍수 속에서 침묵을 잃어버린 세계"라고 진단했습니다. 말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말이 많다는 것이 진리가 많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이 많을수록 진리는 그 소음 속에 묻힙니다. 개구리 떼의 합창이 강하면 강할수록, 정작 들어야 할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재앙의 범위는 충격적입니다. "네 궁과 네 침실과 네 침상 위, 네 신하의 집과 네 백성, 네 화덕과 네 떡 반죽 그릇에 들어갈 것이며." 가장 은밀하고 거룩해야 할 공간부터 일상의 부엌까지, 그 어디에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물리적 묘사가 아닙니다. 궁과 침실은 성소를, 화덕과 반죽 그릇은 먹고 마시는 삶의 양식을 상징합니다. 예배 처소에서 터져 나오는 말씀이 비진리이고, 그것을 먹고 사는 사람들의 일상 자체가 비진리라는 선언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 치하 독일 교회를 향해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사실은 독일 민족의 영광을 설교하고 있다." 그의 말은 단지 1930년대 독일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성공, 자기 건강, 자기 번영을 설교하는 자리에서 개구리 합창은 언제나 울립니다. 그 소리는 웅장하고 은혜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아닌 소리, 방향 잃은 소리입니다.
흥미로운 장면이 있습니다. 아론이 지팡이를 들어 개구리를 올라오게 하자, 애굽의 요술사들도 똑같이 행했습니다. 개구리가 더 올라왔습니다. 그것이 이적에 대한 그들의 대응이었습니다. 개구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개구리를 불러낸 것입니다. 이 장면은 일종의 풍자입니다. 진정한 이적은 죽음을 거두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들은 죽음에 죽음을 더했습니다. 율법의 무거운 짐 위에 더 무거운 짐을 얹었습니다. 비진리의 말 위에 더 많은 비진리를 쌓아올렸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일은 반복됩니다. 어느 설교자는 무대 위에서 감동적인 언어로 청중을 울렸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반드시 복을 받습니다. 더 헌신하십시오. 더 기도하십시오. 더 드리십시오."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위로받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디 있었습니까? 그것이 없는 자리에서, 개구리 떼는 더 요란하게 울었습니다.
재앙 앞에 선 바로는 처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호와께 구하여 나와 내 백성에게서 개구리를 떠나게 하라." 그러나 그 기도의 히브리어는 '아타르', 곧 '간청, 흥정'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은 '차아크'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바로의 기도는 계약서입니다. "이 재앙을 없애 주시면 백성을 보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개구리가 사라지면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실제로 그는 "숨을 쉴 수 있게 됨을 보았을 때에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했습니다(15절).
우리는 얼마나 다릅니까?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은 날 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 이번만 살려주시면 정말 다르게 살겠습니다. 선교도 하겠습니다. 봉사도 하겠습니다." 그리고 결과가 좋아지면, 우리는 바로가 됩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종교적 거래입니다. 하나님을 보험으로 삼는 것입니다. 믿음은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 안에 머물며 견디는 것, 그것이 선물로 주어진 믿음의 본질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물었습니다. "언제 이 개구리가 사라지기를 원하십니까?" 이상한 질문처럼 보입니다. 개구리가 고통스럽다면 당연히 지금 당장 없애달라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는 대답했습니다. "내일." 히브리어 '마하르'. 내일, 차후에, 연기된 시간, 이것이 바로의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를 드러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지금'을 원하지 않습니다. 구원이 오늘 이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은 선언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성경의 시간은 '오늘'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항상 현재형입니다. "내일"은 인간의 완강함이 만들어낸 도피처입니다. 20세기 유대계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말했습니다. "오늘 타자의 얼굴 앞에 서는 것을 내일로 미루는 자는 결코 그 앞에 서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 앞에 서지 못하는 자는, 내일도 서지 못합니다. 바로의 "내일"은 결국 열 번째 재앙까지 이어졌습니다.
개구리는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아 무더기로 쌓았습니다. '호메르', 나귀 한 마리가 짊어질 분량, 220리터의 죽은 개구리 무더기, 그러나 이적이 끝난 후에도 땅에서는 악취가 났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적은 거두어졌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한 죽음의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무거운 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220리터의 개구리 시체를 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냉혹한 진실을 말합니다. 어떤 재앙이 물러간다고 해서 죄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코리 텐 붐은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용서는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 안의 집을 청소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죽은 개구리를 치우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취를 없애는 것, 죄의 근원을 해결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열 번째 재앙까지 바로를 이끌어 가셨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개구리 이적으로 끝나서는 안 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어야만 악취가 사라집니다. 죄의 문제는 오직 그분의 죽음으로만 해결됩니다.
그해 여름 간증 집회가 끝나고, 강당 뒤편에서 한 할머니가 조용히 울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지나쳤습니다. 박수 소리가 가득하던 그 공간에서 아무도 그 울음을 듣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할머니는 십 년 동안 새벽기도를 드렸지만 사업이 기울었고, 자녀들은 하나님을 떠났고, 그 날 간증을 들으며 하나님이 자기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는지를 묻고 있었습니다. 개구리의 합창 속에서 진짜 기도의 소리는 묻힙니다. 비진리의 말이 가득한 곳에서 진리를 향한 부르짖음은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구리를 재앙으로 삼으셨습니다. 풍요의 상징이 심판의 도구가 된 것은, 그것이 진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방향을 잃은 채 울어대는 소리는, 아무리 많고 아무리 웅장해도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개구리가 물속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선포될 때, 땅 위로 올라옵니다. 비로소 그것이 비진리임이 드러납니다. 그 드러남이 이적이고, 그 드러남 앞에서 우리는 바로처럼 선택합니다. "내일" 이라고 말할 것인지, 아니면 지금 이 순간 말씀 앞에 설 것인지를 말입니다.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개구리 합창이 잦아들고, 진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날이 옵니다. 그것이 출애굽이고, 그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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