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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출애굽기

출애굽기 - 티끌이 드러내는 것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령하기를 네 지팡이를 들어 땅의 티끌을 치라 하라 그것이 애굽 온 땅에서 이가 되리라. 그들이 그대로 행할새 아론이 지팡이를 잡고 손을 들어 땅의 티끌을 치매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어 사람과 가축에게 오르니, 요술사들도 자기 요술로 그같이 행하여 이를 생기게 하려 하였으나 못 하였고 이가 사람과 가축에게 생긴지라. 요술사가 바로에게 말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였으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애굽기 8:16~19)

어린 시절, 여름 저녁마다 모기향 연기가 마당을 가득 채웠습니다. 할머니는 작은 모기 한 마리도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손바닥으로 철썩 치시고는 "
이 조그만 것이 사람 피를 빨아먹는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이 그때는 그냥 웃음으로 지나쳤지만, 지금 출애굽기 8장 앞에 서니 할머니의 그 말이 전혀 다르게 들립니다. 모기는 그냥 모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작은 생물을 통해 인간의 본질에 대해 무언가 무겁고도 날카로운 것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애굽은 세상이 부러워하는 나라였습니다. 나일강이 해마다 범람하여 두터운 흙을 남겨놓으면 그 비옥한 토양에서 풍성한 수확이 이어졌습니다. 곡식 창고가 넘쳤고, 사람들은 그 풍요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그 땅 자체를 신으로 섬겼습니다. '
게브', 땅의 신이었습니다. 먹을 것을 주는 땅, 번영을 보장하는 땅, 그것이 그들의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땅에 손을 대셨습니다. 아론이 지팡이로 땅의 티끌을 치자, 그 비옥하던 흙먼지가 온통 모기로 변했습니다. 번영의 상징이었던 것이 순식간에 사람을 괴롭히는 것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재앙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이 신으로 섬기던 그것의 정체를 벗겨내신 것입니다. 번영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이던 것이 실은 저주 아래 있는 것이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오늘도 그 풍경은 낯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땅에서 번영을 구합니다. 더 좋은 직장, 더 큰 집, 더 많은 통장 잔고, 그것 자체가 문제라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목적이 될 때,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할 때입니다. 교회당에 나와 앉아 있으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그 땅의 신에게 향해 있을 때, 하나님은 그 번영의 티끌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십니다.

히브리어로 '
아파르', 티끌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그 티끌로 사람을 빚으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티끌에서 왔고 티끌로 갑니다. 그 티끌이 이번에는 모기가 되었습니다. 사람과 가축에게 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이적을 통해 한 가지 충격적인 진실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티끌의 존재는 결국 다른 티끌의 피를 빨아먹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모기가 되는 것이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민낯입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겹쳐집니다. "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율법의 작은 조항 하나하나는 꼼꼼히 따지면서, 정작 율법이 가리키는 그 분,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박하와 회향 같은 조그만 향초에도 십일조를 드렸지만, 백성들의 어깨에는 벗어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올려놓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티끌이 사람에게 올라붙는 모습입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말씀의 이름으로,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것입니다.

오늘날 형통과 번영을 팔며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
믿으면 된다, 헌금하면 된다, 따라오면 복을 받는다." 그 말에 이끌려 수많은 사람이 날개도 없이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하루살이처럼 모여듭니다. 그리고 그들의 피가, 그들의 헌신이, 그들의 간절함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갑니다. 이 이적은 그 오래된 구조를 고발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요술사들의 반응입니다. 바로 앞의 두 재앙, 피와 개구리는 요술사들도 어느 정도 흉내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아무리 해도 모기를 만들어 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이는 하나님의 손가락이니이다." 그 고백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야고보서는 말합니다. "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그분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 심지어 두려움을 느끼는 것조차 믿음이 아닙니다. 어느 유명한 철학자가 죽기 직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내 삶을 바꾸지는 않았다." 솔직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머리로 아는 것과, 그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요술사들은 "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말했지만, 그 이후에도 바로 곁에서 바로의 완악한 마음을 부추기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삶으로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오늘날 종교적인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바로는 끝내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고 기록합니다. 기묘한 표현입니다. 바로가 완악한 것조차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바로를 즉시 굴복시키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열 가지 이적 전체를 통해 드러나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와 애굽의 죄가 남김없이 폭로되어야 했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의 끝에서 유월절 어린 양이 온전히 드러나야 했습니다. 열 이적은 피로 시작하여 어린 양의 피로 끝납니다. 그 전체가 하나의 계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해 달려가는 긴 이야기는  바로의 완악함도, 요술사들의 한계도, 티끌이 모기가 된 것도,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처럼, 하나님의 손가락이 일하시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완성이 십자가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티끌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
생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티끌이 생령이 된 것은 하나님의 생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관계가 끊어졌을 때, 사람은 다시 티끌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티끌은 서로에게 올라붙는 모기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으십니다. 첫째 아담이 티끌에 속한 자라면, 둘째 아담은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첫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를 둘째 아담 안에서 살려내시는 것이 출애굽이고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
다 이루었다"는 선언이 그 긴 이야기의 마침표입니다. 모기 이적은 작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티끌이 무엇인지를, 인간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 티끌을 생령으로 다시 살려내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여름 저녁 모기향 연기 속에 앉아, 우리는 다시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는가? 티끌의 번영을 구하며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존재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하늘에 속한 둘째 아담의 생기를 받아 생령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 하나님의 손가락이 여전히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