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작은 마을에 고집 센 노인이 살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자신도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신의 생각을 꺾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면 늘 같은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내가 평생 이렇게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바꾸면 내가 뭐가 되느냐."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집을 꺾지 못하는 것이 죄성입니다. 논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출애굽기 9장은 다섯 번째 재앙, 가축의 죽음 이적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십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그러나 바로는 또 거절합니다. 이미 앞선 네 번의 재앙을 경험하고도 바로는 완악함을 유지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단순히 바로의 심리적 완고함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완악하게 잡아둔다"는 표현을 씁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의도적으로 말입니다.
죄는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다.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그것을 붙들게 만듭니다. 진리가 눈앞에 있어도, 경험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역력해도, 자신이 믿어온 것을 놓지 못하게 합니다. 바로는 그 완악함의 극단적인 초상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선포하라 하신 이름이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 이 이름은 출애굽기 내내 반복됩니다. '히브리 사람'이란 '죽음을 건너온 자'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명칭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죽음을 건너, 그 백성을 만드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바로 그 선언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죽음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건너셨습니다. 그렇게 세우신 교회를, 예수님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을 건너온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는 어떤 죽음의 세력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이번 재앙의 대상은 가축입니다. 말과 나귀와 낙타와 소와 양입니다. 히브리어로 '미크네', 즉 소유물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가축은 곧 재산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가치, 한 집안의 부, 한 나라의 힘이 가축으로 계산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그리고 부자 청년에게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재물에 대한 가르침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이 예수님 앞에서 자랑스럽게 내어놓은 것은 물질이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지키었사온대." 그것이 그의 소유였습니다. 율법을 잘 지킨 자신,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자신, 스스로의 의로움, 예수님은 그 소유를 팔라고 하신 것입니다.
문자를 붙들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상태, 그것이 이 재앙에서 죽어가는 애굽의 가축이 상징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별하십니다.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가축과 애굽의 가축을 구별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팔라'는 구별하다, 뚜렷하게 나누다입니다. 그리고 이 동사는 완료형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
왜 이스라엘입니까? 그들이 더 선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더 강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담아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자체로 영광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끊임없이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목적입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철저히 증명함으로써, 오직 하나님만이 홀로 이 언약을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먹을거리로 주셨습니다. 짐승에게는 씨 없는 풀을 주셨습니다. 이 구분은 그냥 생물학적 식단표가 아닙니다. 사람은 씨, 즉 생명을 담은 말씀을 받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은 이성 없는 짐승처럼 본능으로만 살며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렇기에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성 없는 짐승들에게 죽임을 당하심으로 오히려 언약을 완성하셨습니다. 그 완성된 씨를 우리로 하여금 먹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언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베드로도 선포합니다. "너희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은 우리 안에 무엇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언약을 담아 놓으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 때문입니다. 재앙은 실행됩니다. 애굽의 모든 가축이 죽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바로는 사람을 보내어 확인합니다. 눈으로 봅니다. 분명히 확인합니다. 이스라엘의 가축은 단 한 마리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니라." 히브리어 '힌네', "본즉"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바로 지금 여기'를 강조하는 감탄사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도, 바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보되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죄성의 무서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십자가를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죄입니다. 그리고 그 죄가 보이는 순간이 은혜입니다. 내가 보지 못했다는 것, 내가 완악했다는 것, 그것을 깨닫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십자가 앞에 날마다 감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길 자는 없습니다. 바로의 이야기는 결국 굴복으로 끝납니다. 그 결론을 이미 아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 된 교회요, 죽음을 건너온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결론 안에 있습니다. 완악한 세상 한가운데서 흔들리지 않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강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구별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약 말씀 묵상 > 출애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출애굽기 - 파리 떼가 몰려오다, 혼합된 세계에서 구별된 백성으로 (0) | 2026.06.17 |
|---|---|
| 출애굽기 - 티끌이 드러내는 것 (2) | 2026.06.03 |
| 출애굽기 - 개구리의 합창, 말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진리를 찾아 (0) | 2026.05.27 |
| 출애굽기 - 피로 물든 강가에서 (0) | 2026.05.12 |
| 출애굽기 - 뱀을 삼킨 지팡이 (0) | 2026.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