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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출애굽기

출애굽기 - 파리 떼가 몰려오다, 혼합된 세계에서 구별된 백성으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17.

"그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출애굽기 8:22)

대장장이는 쇠를 불에 달군 뒤 두드립니다. 망치질이 폭력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형성입니다. 쇠는 맞을수록 단단해지고, 맞을수록 원하는 형태에 가까워집니다. 장인의 손끝에서 망치질은 곧 사랑입니다. 히브리어에서 "
재앙"을 뜻하는 '막카'는 '나카', 곧 "치다, 때리다"에서 왔습니다. 헬라어 '플레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재앙"이지만, 그 어원의 뼈대에는 두드림이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자신이 "
수없이 매(플레게)를 맞았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맞은 것은 단순한 수모가 아니었습니다. 진리를 거슬러 치는 손 안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애굽에 내려진 열 가지 재앙도 이 관점으로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만 재앙을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재앙은 두드림이었습니다. 그것은 심판과 동시에 드러냄이었습니다. 심판 가운데 있는 자는 더욱 심판으로, 언약 안에 있는 자는 구원의 표징으로, 같은 재앙이 전혀 다른 의미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 있는 곳으로 나오리니." 바로는 매일 아침 나일강으로 나갔습니다. 종교적 의식이었습니다. 그는 신성한 강에서 신의 뜻을 구하고, 자신이 신의 아들임을 확인했습니다. 그것은 성실한 신앙처럼 보였습니다. 꾸준하고, 경건하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
물 있는 곳"이라고만 부르십니다. 나일강, 즉 아랫물이었습니다. 바로가 찾는 진리는 진리의 형식을 갖추었지만 그 안에 진리가 없었습니다. 그의 경건함은 자기 의를 세우는 행위였고, 그의 종교는 참된 말씀이 아닌 의식으로 채워진 빈 껍데기였습니다.

이것이 단지 애굽 파라오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매주 교회에 나가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도 "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확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신앙도 동일한 구조를 가집니다. 강가에 매일 나가지만 하늘에서 내려오는 물이 아닌 땅의 물만 마시는 사람, 바로는 그 형상입니다. 모세는 이 바로 앞에 서서 반복합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기회는 계속 주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악한 자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반복됩니다. 이 반복 자체가 이미 은혜입니다.

"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파리 떼를 보내리라." 히브리어 '아로브'는 단순히 파리가 아닙니다. '혼합하다, 섞이다'는 뜻의 '아라브'에서 온 단어로, 여러 종류의 해충이 뒤섞인 것을 의미합니다. 70인역은 이것을 "개파리 떼"로 번역했습니다. 어떤 성경은 "쇠파리", 또 어떤 성경은 "등에"라고 번역했습니다. 한 가지가 아니라 온갖 것이 뒤섞인 혼합의 재앙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 파리의 신을 "
바알세붑", 곧 '파리의 주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었을 때,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묻지 않고 에그론의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내가 이 병에서 살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아하시야'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붙잡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자가 파리의 신에게 자기 생사를 맡기려 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 길에서 그를 막아서며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에그론의 신에게 묻느냐."

예수께서도 귀신을 쫓아내실 때 동일한 고발을 들으셨습니다. "
저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파리의 신에게 사로잡힌 세계와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나라, 이 둘은 같은 공간에 존재하지만 전혀 다른 실재입니다.

애굽은 파리 떼로 가득 찼습니다. 바로의 궁이, 신하들의 집이, 온 땅이 "
파리의 충만"으로 덮였습니다. 성경은 바로의 성전이 파리의 신으로 가득 찬 상태라고 선언합니다. 그것은 혼합된 종교, 뒤섞인 진리, 세상의 온갖 것으로 채워진 영적 상태의 표상이었습니다.

"
그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라." 이것이 네 번째 재앙부터 등장하는 새로운 요소입니다. 이전 세 재앙은 이스라엘과 애굽을 함께 쳤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부터 하나님은 고센 땅을 구별하십니다. 같은 땅, 같은 하늘 아래에서 파리 떼가 어떤 집에는 가득하고 어떤 집에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리적 구분이 아니었습리다. '
팔라', "구별하다, 나누다, 명확하다"는 이 단어는 신명기와 시편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됨", "경건한 자로 택하심"의 의미로 쓰입니다. 고센에 파리가 없었던 것은 고센 사람들이 더 깨끗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그들 안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코리 텐 붐은 유대인들을 숨겨주다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수용소의 환경은 극악했습니다. 빈대와 벼룩이 들끓는 막사에서 그녀의 언니 베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하나님께 감사드려. 벼룩들 때문에라도 간수들이 우리 막사에 들어오지 않잖아." 실제로 그 막사에서는 다른 곳과 달리 성경 공부 모임이 자유롭게 열렸습니다. 재앙처럼 보이는 것이 오히려 구별의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고센 땅의 구별은 이런 역설적 언약의 논리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의 파리 떼가 몰려드는 한가운데서, 그 혼합의 물결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은 다른 현실을 살고 있었습니다.

재앙에 짓눌린 바로는 모세를 불렀습니다. 그의 첫 번째 제안은 이것이었습니다. "
너희가 이 땅 안에서 제사를 드리라." 애굽을 떠나지 말고, 이 땅 안에서 예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거절하자 그는 다시 양보합니다. "좋다. 광야로 가거라. 그러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얼마나 교묘한 제안입니까? 예배는 허락합니다. 광야도 허락합니다. 단지 "너무 멀리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오늘날에도 종종 교회 안에서 들립니다. "
은혜로 구원받은 것은 맞다. 그러나 그 은혜를 너무 곧이곧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지만 그 다음은 네 몫이다." "너무 멀리 가지 말라." 이 말은 복음의 급진성을 희석시키는 말입니다. 그것은 성도를 여전히 애굽의 경계 안에 붙잡아 두는 바로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답은 분명합니다. "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사흘 길은 상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사흘 만의 부활, 그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예배입니다. 반쯤만 나온 출애굽은 출애굽이 아닙니다.

파리 떼가 물러갔습니다. 모세가 간구했고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성경은 "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라고 기록합니다. 이 구절은 모세의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너를 바로에게 신(엘로힘)으로 세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출 7:1). 모세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 땅에서 구현하는 존재로 세워졌습니다. 그가 간구하고 하나님이 응답하는 형식은 중보자를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언약의 방식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을 때 그것은 기도의 응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이루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파리 떼가 물러가자 다시 마음을 완강하게 했습니다. 재앙이 걷히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완악함의 패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상한 은혜를 봅니다. 하나님은 이 완악함조차 쓰십니다. 바로의 완악함으로 인해 재앙은 계속되고, 재앙의 계속됨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십자가도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완악한 종교 권력자들, 무고한 자를 정죄하는 율법의 논리, 등을 돌린 제자들 , 그 모든 인간의 실패와 완악함 위에서 하나님은 홀로 다 이루셨습니다.

파리 떼가 세상을 뒤덮습니다. 혼합된 가치, 뒤섞인 진리, 세상의 소음으로 뒤덮인 이 시대에 우리는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바로의 궁입니까, 고센 땅입니까? 고센은 지도 위의 장소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담긴 자들이 머무는 현실입니다. 그 현실은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파리 떼가 몰아치는 같은 공간에서, 온 세상이 혼합의 신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별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백성에게 말합니다. "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부르심은 단호합니다.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붙잡는 바로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사흘 길 광야로 걸어 들어가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는 것, 그것이 출애굽이고,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