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말에서 “안다”라는 단어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과 ‘경험으로 아는 것’, 이 두 가지의 차이는 때때로 우리의 인생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곤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누군가에 대해 ‘들어서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의 명성, 말, 행동에 대해 들은 지식으로 그를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함께 밥을 먹고, 웃고, 슬퍼본다면, 그때는 전혀 다른 차원의 ‘앎’을 얻게 됩니다. 그때의 앎은 머리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설교나 책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배워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를 ‘경험으로 아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황에 따라 때로는 지식으로, 때로는 경험으로, 자신을 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에서 ‘안다’라는 말은 단 하나의 의미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양한 뉘앙스와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널리 쓰이는 단어가 ‘야다’ 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정보를 아는 것을 넘어, 어떤 존재를 ‘인정하고, 굽어살피며, 깊이 관계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3장 5절에서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할 때 쓰인 단어도 바로 ‘야다’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지적 인식이 아니라, 관계적 이해를 포함합니다.
또 다른 단어로 ‘로이’ 가 있습니다. 창세기 8장 8절에서 “노아가 비둘기를 내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었는지를 알고자 하매”라고 할 때 쓰인 단어로, 상황을 ‘살펴보고 파악하다’는 의미입니다. ‘나카르’는 ‘깨닫지 못하다’, ‘인식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요셉이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 장면(창 42:7~8)에 쓰입니다. ‘샤마’는 ‘배워서 알다’는 의미를 가집니다(신 28:49).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묵상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다아트’입니다.
‘다아트 엘로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다아트’라는 단어는 욥기 10장 7절에 처음 등장합니다.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이 단어는 단순히 ‘지적 이해’를 넘어, ‘깊이 살피고, 경험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호세아 6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다앗 엘로힘’입니다. 호세아는 대부분 ‘야다’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이 구절에서만큼은 특별히 ‘다아트’를 썼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단순히 지식적, 의식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감정적 교감, 인격적 연합, 공감의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호세아와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같은 방향을 향합니다. 예레미야 22장 16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마음을 알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자를 사랑하고, 그분의 공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죄를 ‘불의’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악한 행실을 신랄하게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호세아는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심령의 참뜻을 잃어버렸다고 고발했습니다. 그들에게 제사와 번제는 남았지만, 하나님과의 ‘감정적 일체감’은 사라졌던 것입니다. 그들의 예배에는 형식은 있었지만, 사랑은 없었습니다. 의식은 있었지만, 인애는 없었습니다.
호세아가 사용한 ‘다아트’ 는 바로 그 결핍을 드러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예배의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공감하는 관계라고 말합니다. 그분의 마음을 알고, 그분이 슬퍼하시는 일에 함께 슬퍼하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함께 기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다앗 엘로힘) 입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을 얼마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분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고, 신학을 공부한 지식은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느끼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사랑하며, 그분의 아픔을 함께 아파한 적은 얼마나 될까? 하나님을 아는 일은 단순히 머리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슴의 일이며, 삶의 일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분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며, 그분의 손으로 가난한 자를 붙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호세아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을 ‘아는 것’. 그것은 사랑과 공의가 만나는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감 속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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