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을 구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구하노라.”(요한복음 5:30)
우리가 영성 훈련을 하는 이유는 단순히 더 많은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그분의 시각으로 세상과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깊이 아는 길은 머리로만 이해하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삶이라는 현실 속에서 경험되고, 그 경험을 묵상하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진짜 ‘앎’이 형성됩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도 하나님과 함께 걸어본 경험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결국 자기 생각의 틀에 갇힌 신앙인이 되고 맙니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만 ‘서울이 이렇다’고 확신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가 본 사람보다, 가보지 못한 사람이 더 강하게 주장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서울에 가보지 못한 사람이 가본 사람을 이긴다.” 경험 없는 사람의 고정관념이 때로는 실제를 본 사람보다 더 완고할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조금만 아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자기 생각을 더 강하게 붙잡고,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진리라고 굳게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설픈 지식은 언제나 약점을 품고 있고, 사람은 그 약점을 감추기 위해 더 강하게 주장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경험으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변적 신앙인’으로 남아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경험이라는 학교로 초대하십니다. 기도할 때 응답이 지연되는 경험, 억울함을 당하는 경험,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경험,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갑자기 맞닥뜨리는 경험, 하나님의 위로를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험하는 경험을 하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의 재료입니다. 우리는 대개 우리의 입장, 우리의 기대, 우리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자연인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자신의 기준 안에 넣어 판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합니다. “손은 안으로 굽는다.” 내 편을 들어 주는 하나님, 내게 유익한 하나님, 나의 길을 지지해 주는 하나님을 은연중에 만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안쪽으로 굽는 손’처럼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가 가진 주관적이고 이기적인 시각을 깨뜨리기 위해 때로는 우리를 거칠게, 불편하게, 불확실하게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잣대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긍정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없습니다. 세상은 긍정적 사고를 강조하고, 밝은 면만 보라고 합니다. 물론 긍정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긍정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결국 진실을 놓치는 신앙이 되고 맙니다. 성령의 열매에는 위로라는 요소가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에도 권면이라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긍정, 즉 하나님의 관점을 바탕으로 한 긍정이어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 좋은 말만 하는 것은 결코 예언자의 사명도, 성령의 위로도 아닙니다.
여호사밧 왕 시대의 미가야 선지자가 그 예입니다. 왕은 “길한 말만 하지 않고 흉한 일만 예언한다”며 그를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미가야가 부정적으로 말한 것은 그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을 그대로 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짜 예언자는 다수가 ‘예’라 해도 하나님이 ‘아니오’라고 하시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이 주어집니다. “나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위로하고 권면하는가, 아니면 내 성향과 기질로 선한 척하는가?”
자연인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늘 자기에게 유익한 결론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듣기 좋은 말만 붙잡고,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하나님’은 사실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춘 거울일 뿐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세인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기준, 자신의 의, 자신의 유익으로 하나님을 사용했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잣대 앞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의 본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 하지 말라. 나의 관점으로 보아라.” 하지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기 방어, 자기 중심적 판단, 자기 보존,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본성,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자연적 생존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이 본능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며,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즉, 내 삶의 주인이 ‘나’가 아니라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신앙의 항복입니다.
경험과 묵상은 우리를 예수님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영성가들의 삶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자신을 비우고, 결국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성자들에게만 주어진 삶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종착지입니다.
왜 그들은 그렇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많은 영적 경험을 묵상하는 가운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시각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경험은 신앙을 흔들어 놓습니다. 묵상은 신앙을 바로 세웁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결국 우리를 예수님 닮은 삶으로 이끌어 갑니다.
주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면, 자연적으로 나오지 않을 행동들이 나오게 됩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용서하고, 내려놓고, 양보하고, 진리를 위해 고난을 선택하는 일들이 가능해집니다. 이런 일들은 자연인의 눈에는 언제나 어리석고 미련해 보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길은 언제나 좁고 인기 없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 생명이 있고, 진리가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자유가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아무 것도 없어도 “여호와로 즐거워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단지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을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성숙한 신앙은 결국 이렇게 요약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 그리고 그 길은 경험 → 묵상 → 시각의 변화 → 삶의 변화라는 영적 흐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자연인의 잣대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잣대를 배우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그 길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짜 자유와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우리를 그 길로 초대하십니다. 삶에 허락하신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보고, 그 경험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관점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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