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이사야 55:8~9)
경상도 어느 산골 마을에 오래된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교회를 평생 섬겨온 권사님이 있었는데, 남편이 갑작스럽게 쓰러져 오랜 병원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병원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저축해 두었던 돈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그 권사님은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 무릎이 닳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아니,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어느 날 이웃집 아주머니가 넌지시 말을 건넸습니다. "저 아랫동네에 용하다는 보살이 있는데, 한 번만 가 보면 마음이 좀 풀릴 거야." 권사님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그 제안이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섭도록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이 말은 성경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진리이지만, 막상 우리 삶에서 그것을 실감하는 순간은 언제나 고통스럽습니다.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기도는 했으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간극 앞에서 절망합니다. 성경이 우리 손에 있고, 설교가 매주 귀에 들리고, 믿음의 공동체가 곁에 있는데도 가슴 속은 여전히 답답하고 막막합니다.
구약을 읽다 보면 섬뜩한 기시감이 찾아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선지자가 있었고, 제사장이 있었고, 하나님의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길을 잃었습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조차 병든 자들은 실로암 연못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거룩한 찬양이 울려 퍼지는 성전보다 차가운 연못가가 그들에게는 더 현실적인 위로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지금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몇 해 전, 한 집사님이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처했습니다. 오랫동안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았고, 빚은 쌓여갔으며, 가족을 부양할 방법이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직장 소장이 도움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단,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자신이 신임하는 무당에게 가서 얼굴을 한 번 보여주면, 그 무당이 투자해도 된다는 신호를 주고, 그러면 목돈을 빌려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사님은 갈등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거절했습니다.
소장은 황당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목사도 전도사도 아닌데 뭘 그렇게 까다롭게 믿어요? 거기엔 목사도 전도사도 다 잘 오던데.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요? 얼굴 한 번 보여주는 게 뭐가 대단하다고." 이 말이 섬뜩한 이유는 그것이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런 곳에 드나드는 사람이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섬뜩한 것은, "얼굴만 한 번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이 너무나 그럴듯하게 들린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작은 타협처럼 보입니다. 산당에서 분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대단한 결심을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배반한 것도 아니고, 그저 답답한 마음에 가까운 곳에서 위로를 찾은 것뿐이라고 말입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죄는 언제나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너무 멀었습니다. 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반면 산당은 가까웠습니다. 동네 어귀에 있었고, 형식도 복잡하지 않았으며, 바알의 제사는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산당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 종교처럼 느껴졌을 리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일상이었습니다. 아침에 밥을 먹고, 밭을 갈고, 저녁에 산당에서 향을 피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산당은 어디에 있습니까? 운세를 검색하고, 사주를 보고, 복권을 사는 행위들이 그것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요? 절간의 백일기도를 흉내 낸 것처럼 그 의미도 모른 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작정기도는 어떠합니까?
묵상기도가 무엇인지, 관상기도가 무엇인지 배워본 적 없는 많은 성도들이 영적인 일에는 그저 손을 놓고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산당을 좇아간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백성과 다를 바 없이 되어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함께 무지의 어둠 속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목회자는 넘쳐나지만, 성도들의 영혼이 방향을 잃고 떠도는 것은 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중세 교회가 면죄부를 팔 때, 아무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교황의 인장이 찍힌 종이 한 장이 연옥의 시간을 단축해 준다는 말을 모두가 믿었습니다. 아니, 믿고 싶었습니다. 돈을 내면 죄가 사해진다는 논리는 너무나 편리했고, 교회가 공인했으니 의심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한 젊은 수도사가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 조항을 못으로 박았습니다. 그 소수의 목소리는 처음에 조롱받았습니다. 위험한 자로 낙인찍혔습니다. 교회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선지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소수였고, 인정받지 못했으며, 때로는 목숨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엘리야는 도망 다녔고, 예레미야는 웅덩이에 던져졌으며, 아모스는 "선지자 행세 그만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의 화려한 예배를 통해서가 아니라, 광야의 낯선 목소리를 통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낯선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모세에게는 떨기나무의 불꽃으로, 아브라함에게는 지나가는 나그네로, 엠마오 제자들에게는 신원을 알 수 없는 동행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으로 오셨고, 제사장과 바리새인은 그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알아채지 못합니다.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이 뜨거운 한낮에 장막 문 앞에 앉아 있을 때 찾아온 세 나그네를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을 맞아들였고, 대접했고, 그리고 그 낯선 방문자들로부터 놀라운 약속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 바깥에서 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대 안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은 결코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때 낯선 사람이 다가와 함께 걸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셨으나 그들의 눈은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분이 말씀을 풀어주실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떡을 떼시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눈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라지셨습니다.
하나님은 늘 그렇게 오십니다. 잠깐, 낯설게, 그리고 사라지십니다. 우리가 그 낯선 모습에 마음을 닫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이미 지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목이 곧고 고집이 센 백성"이라 하셨습니다. 이 표현은 꾸짖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애끊는 탄식이기도 합니다. 목을 돌리지 않으면 볼 수 없습니다. 고집을 내려놓지 않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을 우리의 방식으로 끌어내리려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우리가 원하는 형태로 오시기를 요구합니다. 그렇게 오시지 않으면 그분이 침묵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말씀하시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계시는 없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이스라엘에게도 성경이 있었습니다. 율법학자가 있었고, 서기관이 있었고,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했고, 가르쳤고, 이스라엘은 그 가르침을 하나님처럼 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선지자를 세우셨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찬양이 울려 퍼질 때, 성전 밖 실로암 연못에는 병든 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성전의 찬양은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더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저 안에서 노래하는데, 나는 여기서 떨고 있구나 하는 그 소외감입니다. 지금도 주일마다 교회에 앉아 있지만 가슴은 텅 빈 채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찬양이 공허하게 느껴지고, 기도는 천장을 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멀고, 침묵하고, 알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이 아니라 실로암 연못가로 가셨습니다. 그분은 찬양 받는 자리보다 고통받는 자의 곁을 선택하셨습니다. 삼십팔 년 동안 그 자리에 누워 있던 한 사람에게 다가가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너무나 당연한 질문처럼 들리지만, 그 질문 속에는 깊은 부름이 있었습니다. 낯선 사람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명의 음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릅니다. 그것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은혜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길이 막힐 때, 우리가 기대하던 방향이 무너질 때, 비로소 우리는 낯선 방향에서 오시는 그분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 낯선 음성을 듣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식이 아닙니다. 더 정교한 신학도 아닙니다.
다만 고집스럽게 굳어 있던 목을 조금, 그분이 오시는 방향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 곁을 걷고 계십니다. 낯선 모습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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