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세기 2:7)
성경은 모든 인간을 “죽은 자”라 선언합니다. 그건 비유가 아닌 진단이고, 선언이며, 실존입니다.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 태어나며, 그 자체로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동시에, 죽었던 우리가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성숙, 사랑, 인내 같은 외적 열매들입니까? 그런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일 수는 있어도 본질은 아닙니다.
죽은 자는 감각이 없습니다. 통증조차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살아 있다는 증거는 ‘감각’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인간적 감정의 희로애락을 말함이 아닙니다. 그건 죽은 자도 누립니다.
진짜 살아 있는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감각이 살아난 자입니다. 하나님의 부재를 통증처럼 느끼고, 하나님의 임재를 숨결처럼 느끼는 자, 하나님의 말씀에 가슴이 뜨거워지고, 하나님의 침묵에 마음이 저려오는 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살아 있음이 고통을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생기로 살아났는데, 어째서 그렇게도 깊고 예민한 고통이 느껴지는 걸까요? 왜 때로는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아픔이 성도에게 찾아오는 걸까요?
하나님은 창세 전에 완성해 놓으신 나라, 그분의 나라를 이 역사라는 강의실을 통해 자녀들에게 교훈하십니다. 이 땅에서의 통점(痛點)은 단순한 벌이 아니라 ‘교훈’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쌓아 올린 자아의 나라는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그 허무 속에서 나오는 것은 끝없는 실패와 고통뿐이라는 것을… 살아 있는 자는 그것을 '살아내며' 배우는 자입니다.
숨을 배웠습니다. 뇌파 치료 속에서 ‘호흡’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생명활동을 다시 배워야 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이마시게 하신 그분의 숨, 그게 바로 생기입니다.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콧김이 우리를 살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곧 우리에게 들어오신 하나님의 숨이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우리가 고통스러워했던 이유는 우리 자아의 숨, 우리 방식의 호흡을 지켜내려 애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숨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숨을 지켜내려 싸우는 동안, 오히려 더 숨이 막혔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진짜 숨을 쉬고 싶습니다. 그 숨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들숨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아를 내어놓는 날숨입니다.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하나님의 숨이 들어옵니다. 숨을 내쉬었습니다. 내 육적 자아가 빠져나갑니다. 그 안에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그 안에 평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평안 속에서, 오랜만에 행복했습니다.
사람들은 “산 자의 증거가 무엇이냐”고 종종 묻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공식화된 증거는 없습니다. 다만 살아있으면 압니다. 자기 자신은 압니다.”
성도는 고통만을 감지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들숨,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기쁨을 감지할 수 있는 자입니다. 우리는 그 행복의 감각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으로 행복하고 싶습니다. 예배하는 일상으로 행복하고 싶습니다. 이런 일상 속의 은혜가 천국의 삶과 멀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참 많이 아파했기에, 이제는 그 하나님의 숨결로 회복되기를, 그 사랑의 감각이 다시 깨어나기를…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진짜 숨을 쉬는 성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숨결로 오늘도 살아내는 당신에게, 평안과 행복이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가 살아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에스겔 3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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