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누가복음 9:23)
성결교단의 문준경(1891∼1950) 전도사는 여성사역자로서 성결교를 대표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녀의 헌신적인 사역과 활동이 지금까지 많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문전도사가 고향인 전남 신안군의 섬들에 설립한 증동리교회, 진리교회, 대초리교회 등 10여 교회는 오늘날 기독교를 대표하는 수많은 목회자들(김준곤 이만신 정태기 이만성 이봉성목사 등 30여명)을 배출하는 믿음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과 헌신, 사역은 섬을 중심으로 한 호남선교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전남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의 작은 섬에서 출생한 문준경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지런해 주위의 칭찬과 기대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고 싶어 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08년 17세의 나이에 신랑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중매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1933년 문준경전도사는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정규학생이 되지 못했고 그나마
이성봉목사의 추천으로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해 청강생으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서로 마음이 합하지 않은 결혼은 두사람 모두에게 고통이었습니다. 외지를 도는 남편은 아내를 돌보지 않은 채 목포에 소실을 두고 자녀까지 낳아 살고 있었고 문준경은 이 때부터 자신은 ‘남편있는 생과부’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며느리로서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형제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데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시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국문을 깨우치고 한문을 공부하는데 할애했습니다.
자신을 극진히 아껴주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도 큰 시숙과 생활하게 돼 갈 곳이 없어진 그녀는 목포로 건너와 단칸방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한줄기 놀라운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삶의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간 교회가 유명한 성결교부흥사인 이성봉목사(당시 전도사)가 초가집 한간을 얻어 막 개척을 시작한 북교동성결교회였습니다.
이성봉목사의 설교는 미래에 대한 희망도 낙도 없었던 그녀에게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게 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평안은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기대와 기쁨을 채워 주었습니다. 1년만에 학습과 세례를 받고 개인전도와 축호전도에 가장 열성을 보이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집사직분을 받은 그녀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생을 헌신할 것을 서원하고 죽을 때까지 복음을 전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경성성서학원(서울신대전신)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기도한 결과 청강생으로 입학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결혼한 여자는 입학할 수 없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정규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학금도 받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던 그녀는 이성봉목사의 보증과 요청으로 결국 정규학생이 되어 기숙사에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문전도사의 전도열정은 남달라 방학마다 고향으로 내려가 33년 진리교회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35년 증동리교회, 36년 대초리교회를 차례로 건립했습니다. 방축리에는 기도소를 지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오직 믿음만으로 교회를 세운 그녀에게 수많은 어려움과 고초가 쉬지않고 따랐으나 기도는 언제나 승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졸업 후에도 대도시를 마다하고 증도로 돌아 온 문전도사는 나룻배를 타고 이섬 저섬 무교회지역을 돌며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녀는 주민들의 부탁으로 짐꾼노릇, 우체부노릇을 마다하지 않았고 섬주위 돌짝밭길을 얼마나 걸었는지 1년에 고무신을 아홉컬레나 바꿔신었다고 전해집니다.문전도사의 열정적인 기도는 신유의 은사까지 더해 정신병자, 중풍병자를 고쳐내 ‘섬 여의사’란 말까지 들을 정도였습니다.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성결교단이 강제해산됨과 동시에 문전도사가 개척한 증도교회에까지 여파가 미쳤습니다. 그녀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며 목포경찰서로 불러내 고문을 일삼았습니다.
이 때마다 문전도사는 찬송가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를 부르며 에스더서 4장16절 “죽으면 죽으리라”를 수없이 되풀이 했습니다. 아무리 회유와 협박이 이어져도 굴욕적인 신사참배는 허락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해방후 공산당을 따르는 좌익들의 활동은 이 작은 섬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6·25 후 지역 전체가 인민군의 손길에 넘어가자 평소 교회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이들이 문전도사와 성도들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50년 10월 4일 국군이 증동리섬까지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악의에 찬 공산당원들은 교인과 양민들을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이끌어 냈습니다. 그리고 한사람씩 단도로 내려쳐 죽이는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문전도사에게 와서는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구만”이라며 몽둥이로 내리쳤고 그녀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마지막말을 남기고 이어진 총탄에 의해 순교했습니다. 당시 59세, 이 사실은 옆에 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수양딸 백정희전도사에 의해 알려졌습니다.
문전도사의 헌신과 사역은 한톨의 밀알이 되어 30배, 60배, 1백배의 열매를 거두었고 그녀가 흘린 피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순교’라는 말을 들을 때, 보통 초대교회의 사도들이나 로마제국의 박해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바로 이 땅, 한국의 바닷가 작은 섬에서도 복음 때문에 생명을 내어놓은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문준경 전도사입니다. 그녀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이 무엇이며, 진짜 복음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산 증언입니다.
문전도사의 삶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원치 않은 중매결혼, 남편의 외도, 사회의 제약, 경제적 고통, 모든 것이 그녀를 짓눌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원망 대신 순종을 선택했고, 슬픔 대신 기도를 택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한 인생에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따라, 기꺼이 가시밭길을 걸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멘’으로 응답한 그녀는 가난한 섬들을 복음으로 채워갔습니다. 누구도 가지 않으려 했던 섬과 외딴마을에 교회를 세우고, 우체부가 되고, 짐꾼이 되며, 아픈 자들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그녀가 세운 교회들은 이후 한국 교회를 이끌 수많은 목회자들을 길러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실보다도 더 위대한 것은 그녀의 한 알의 밀알된 삶, 그 자체였습니다.
1943년, 일제의 핍박 속에서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죽으면 죽으리이다”를 되뇌던 그녀는, 결국 6·25 전쟁의 한복판에서 복음으로 인해 순교하게 됩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셨던 말씀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세상은 이처럼 고요하고 숨겨진 순교를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그녀의 피는 호남 땅에 뿌려져 수많은 생명으로 열매 맺었고, 오늘도 복음의 불꽃은 꺼지지 않습니다. 문준경 전도사는 성결교단의 자랑이기 이전에, 한국교회가 다시 기억해야 할 진짜 복음의 증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비용’도 치르지 않고, 아무런 ‘대가’ 없이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문전도사의 삶은 묻습니다. “당신은 복음을 위해 무엇을 포기했는가?” “당신의 헌신은 어디까지 진실한가?”
복음은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그 복음을 지켜내는 자의 삶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가 복음 앞에 설 때,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단한 우리의 길 위에 문준경 전도사처럼 고백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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