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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에 속한 사람들

혼과 영이 갈라지는 자리에서 시작되는 참된 영성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7. 17.

우리는 흔히 자신을 "영적인 존재"라 말하지만, 그 말의 실체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한 걸음 더 깊어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고비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영과 혼의 분리라는 실제적인 체험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상징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는 자의 내면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야 할 분리와 변화를 말합니다. 이 분리는 신학적 개념이기 이전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가능해지는 영적 사건입니다.

그러면 영과 혼의 분리란 무엇인가? ‘
’은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영역이며, ‘’은 우리의 사고, 감정, 의지 등 자아의 중심입니다. 혼은 타고난 생명이며, 인간적 판단과 감각, 정서를 바탕으로 작동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혼의 작용, 즉 타고난 열심, 감성, 이성에 의해 움직일 때가 많습니다. 선하다는 이유만으로, 옳아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일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함'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혼적 생명에 속한 것일 수 있습니다. 선악과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검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칼은 관절과 골수를 찌를 수 있지만, 오직 하나님의 검만이 사람 안에 가장 미묘하게 얽힌 혼과 영을 찔러 쪼갤 수 있습니다. 이 검이 우리 삶 속에 작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영에 속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혼의 지배 아래 살아가게 됩니다.

왜 이 분리가 중요한가? 영과 혼이 분리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혼의 반응을 '
영의 직감'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감동을 ‘성령의 인도’라 여기고, 정열을 ‘거룩한 열심’으로 혼동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위험한 상태입니다. 혼의 열심은 성령을 대신할 수 없고, 혼의 감정은 진리를 변형시킬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영적 생명은 혼과의 혼합으로는 유지되지 않습니다.

영과 혼이 분리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
자연적인 선함’조차 십자가에 못박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선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섬기려 하다가도,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의, 자기의 만족,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런 삶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거할 수 없습니다.

영과 혼의 분리는 지식이 아닌 체험입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통해 이론적으로 배우지만, 그것이 실제가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의 내면을 깊이 찔러야 합니다. 혼의 생명, 곧 자아가 십자가 아래에서 무너지고 깨어질 때, 비로소 영은 홀로 드러나 자유롭게 됩니다. 이는 단번에 이뤄지는 일이 아니라, 오랜 갈망과 추구, 기도,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점진적인 역사입니다.

이 체험 속에서 믿는 자는 처음으로 진정한 영의 직감에 민감해지며, 혼의 개입이 있을 때마다 즉시 고통을 느끼고 저항하게 됩니다. 혼의 소리가 너무 커서 영의 미세한 감동을 덮어버릴 때, 그는 더 이상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
영의 자유’이며, ‘혼의 제어’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이란, 단지 신비한 체험이나 은사적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혼이 철저히 분리되어 영의 다스림 아래 놓인 사람입니다. 그의 판단, 감정, 결정,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생명과 뜻에 반응하는 영의 직감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 삶은 늘 십자가 아래에서 자기 생명을 거절하며, 성령의 교통과 인도를 갈망합니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타고난 것, 심지어 그것이 ‘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다면 그것이 더러운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그는 혼의 ‘좋은 의도’까지도 하나님의 불로 태워지길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청결한 감정과 동기의 탄생이며, 그로 인해 그리스도의 생명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 삶이 시작됩니다.

혼과 영이 분리되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자란다고 착각하면서도 여전히 혼적인 생명을 신앙의 수단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피상적인 열심, 피로한 사역, 의무감으로 가득 찬 예배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그 사람을 통해 중요한 일을 이루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생명으로, 자기 뜻을 이루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생활은 화려함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어두운 내면에서의 해체와 해부, 곧 혼과 영의 분리에서 시작됩니다. 이 분리는 단순한 수동적 체험이 아니라, 믿는 자가 진실로 갈망하고 추구하고 헌신할 때 주님께서 그의 삶 속에 능동적으로 개입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분리를 통해서만 우리는 성령이 머무실 유일한 처소로서의 영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고, 그곳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사는 참된 영적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워치만 니는 “
영에 속한 사람이 되기 위해 반드시 혼과 영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반복해서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우리의 영이 성령과 교통하는 자리, 바로 그곳에서 진정한 예배와 신앙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영이 혼의 덮개 아래 억눌려 있다면, 아무리 많은 종교적 행위와 의로운 행동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과의 참된 교통은 불가능합니다.

영과 혼의 분리를 위해 우리는 말씀 앞에 자신을 날마다 드러내야 합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혼의 생명이 철저히 처리될 때, 비로소 성령은 우리의 영 안에서 자유롭게 운행하실 수 있습니다.

“주여, 내 혼의 열심이 아닌, 당신의 영의 생명으로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