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희망은 반드시 찾아온다.” 이 말은 단순한 긍정의 언어가 아닙니다. 삶에 대한 태도이며, 마음의 방향이며, 존재의 자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원하지만, 정작 희망을 맞이할 준비는 하지 않습니다. 마치 손님을 맞이하지 않으면서도 손님이 오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희망은 준비된 마음의 집에 들어섭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손님이라도, 초대받지 못하면 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라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의 기대가 아니라, 믿음으로 인내하며 준비하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준비 없는 바람은 망상에 불과하지만, 준비하는 바람은 소망입니다. 희망은 이 소망과 함께 옵니다. 준비된 자의 곁에 말입니다.
어느 시골 마을에 늘 웃음을 잃지 않는 농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해 봄, 긴 가뭄이 이어졌고, 마을 사람들은 속속 밭을 포기하고 다른 생계를 찾으려 떠났습니다. 하지만 이 농부는 매일 새벽이면 밭에 나가 씨앗을 뿌리고, 땅을 고르고, 마른 흙 위에 물을 조금씩 부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습니다. “아니, 비도 안 오는데 왜 씨를 뿌리는가? 시간 낭비 아닌가?" 그러나 그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비가 언제 올지 모르지만, 비가 올 때 나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잖아요.”
그리고 정말로 어느 날, 큰비가 내렸습니다. 그의 밭에서는 싹이 나기 시작했고, 몇 달 후엔 마을 전체가 그의 추수를 보며 놀라워했습니다. 그 농부는 비를 ‘희망’이라 여겼습니다. 그는 그 희망이 문을 두드릴 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미리 문을 열어놓았던 것입니다. 준비된 자의 기쁨은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인내와 성실함의 열매입니다.
희망은 마음의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희망은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피어나는 것입니다. 희망은 정답이나 보장된 약속이 아니라, 방향과 시선입니다. 절망을 보며 넘어지는 대신, 절망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치는 태도 말입니다.
낙관주의는 현실을 무시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의 무게를 정확히 직시하면서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능력입니다. 헬렌 켈러는 눈이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았으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희망’이라는 빛으로 세상을 다시 보았습니다. “낙관주의는 성공으로 인도하는 믿음이다”라고 말한 그녀의 고백은, 희망이 단지 감정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당신은 희망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절망의 바다 속에서 희망의 등불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등불을 보기 위해선 먼저 눈을 떠야 하고, 희망이 들 수 있는 방을 정리해 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준비하고 있지 않다면, 희망은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의 선하심을 산 자들의 땅에서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시 27:13)라는 다윗의 고백은, 절망의 현실 한복판에서 피어난 믿음의 고백이자 희망의 선언이었습니다.
오늘도 당신은 희망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나는 희망을 맞이할 마음의 방을 청소했는가? 나는 희망이 왔을 때, 맞이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지금 희망을 실현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나님은 희망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희망은 그분의 때에 반드시 찾아옵니다. 다만 그 희망이 당신을 지나치지 않도록, 문을 열고 기다리십시오.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준비하십시오. 그러면 이룰 것입니다.
'신앙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순종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가? (1) | 2025.08.04 |
---|---|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내며 - 부르심 (2) | 2025.08.04 |
세상에 특별한 존재란 없다 (2) | 2025.08.03 |
하나님을 안다는 것 (2) | 2025.08.03 |
내 팔에 의지하리라 (2) | 2025.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