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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말씀 묵상

히브리서 - 건너뛰는 피,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23.

히브리서 11장 28절.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애굽의 어느 밤, 한 가족이 문 앞에 섰습니다.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우슬초 묶음을 어린양의 피에 적셔 문의 위 가로대와 양쪽 기둥에 발랐습니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 붉은 자국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이 가족은 의로워서 선택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굽 사람처럼 살다가 갑자기 "
피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들었고, 그 말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 밤 하나님은 피 바른 집을 건너뛰어 지나가셨습니다. 이것이 유월절, 영어로 패스오버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8절은 모세가 "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정하였다'는 한 번 하고 끝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성도의 인생 속에서 계속 일어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거듭 깨닫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고, 그러니 내게는 예수의 피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피로 살아난 이스라엘은 곧장 가나안으로 가지 못하고 광야를 지났습니다. 누군가 가나안에서 "
당신들은 어떻게 여기 왔소?" 하고 물었다면, 그들은 무엇이라 대답했을까요? "열심히 착하게 살았더니 왔다"고는 못 했을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광야에서 내내 자기들의 실체를 드러냈습니다. 홍해를 건너고도 원망했고, 불뱀에 물렸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가나안에 닿을 때쯤 그들의 대답은 하나뿐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양의 피로만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광야를 두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광야는 사막입니다. 물이 없고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사람은 "
내 힘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며 이것저것 짓고 시도합니다. 그러다 무너지고서야 "예수만이 살 길이구나" 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시몬'이라는 이름에는 광야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내가 할 수 있다"고 장담하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성령이 부어지고서야 반석이라는 이름의 베드로가 되어 생수를 전했습니다. 고린도전서가 말하듯 반석은 생수를 쏟아 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가복음 5장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몬은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 장면에서 배와 그물이 히브리어로는 성전과 말씀과 닿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밤새 헛수고한 것은 가짜 성전에서 열심히 일한 인간의 행위가 부정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지자 그물이 "
찢어졌다"고 하는데, 고기가 많아서 찢어진 것이 아니라 산산조각 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로 읽지 못하고 글자 하나하나로 조각내는 사람은 그 말씀으로 사람을 낚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곧바로 엎드려 말합니다. "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부활하신 뒤 같은 장면에서는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깊이입니다. 우리는 흔히 "물고기가 예수의 상징이라니 신기하다" 정도에서 멈춥니다. 그러나 성경은 파고들수록 두 가지만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목소리, 그리고 그것을 꺾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 불편한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신천지나 구원파가 가르치는 것과 오늘의 교회가 가르치는 것은 정말 다릅니까? 이만희는 자기만이 말씀을 푸는 사람이라 하고, 많은 교회는 "
우리 교회가 최고"라고 합니다. 이만희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책을 다 인용해 놓아서 신학자들이 그를 공격하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구원파의 입문 강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신학교 못지않게 설명합니다. 그러니 한번 들어가면 "이단이라더니 정통이네" 하며 못 나옵니다. 마귀는 언제나 말씀을 들고 와서 속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단들이 가르치는 중심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지식을 얻고 성경을 배우면 시험에 걸리지 않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성 교회도 "
열심히 노력해서 거룩해지자"고 하며 이천 년을 걸어왔습니다. 오늘도 강단에서 "소문으로 신천지를 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이용해 예수를 설명하신 분입니다. 사탄이 심어 놓아 하나님도 막지 못한 우발적 열매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시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시골에 있는 도랑을 보면, 어렸을 때 비가 많이 온 뒤 도랑 앞에 서면 무서워서 저 멀리서부터 달려와 힘껏 뛰어 넘었습니다. 그래도 푹 빠지곤 했습니다. 어른이 되어 가 보니 한 발이면 건너는 한 뼘도 안 되는 도랑이었습니다.

십자가와 보혈의 뜻을 조금씩 알아 갈수록 우리는 시험에 덜 빠집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열심히 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 되는 것이니, 성숙의 모습이 보이더라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찬송할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는 것은 아들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는데, 원어로는 "이는 내 아가페, 내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곧 아들이십니다. 그 아들을 내놓을 수 있는 분이 진짜 사랑하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이야기도 그래서 자기를 바친 이야기로 읽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여자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아이를 낳습니다. 교회도 예수를 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일과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합력하여 "
아, 예수구나" 하고 결론 나는 것이 예수를 낳는 일입니다. 이 결론을 막으려는 힘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곳은 의외로 예배당 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 적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진리를 거듭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끌려가게도, 애굽에 내려가게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강대국의 힘을 빌려 자력으로 벗어나려 할 때마다 그 시도는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종으로 있는 그곳에서 "
살려 주십시오!" 하는 부르짖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건져 내실까요? 이사야의 말로는 백향목 꼭대기의 연한 순 하나를 꺾어서입니다. 다윗 왕조의 왕들은 다 실패했습니다. 솔로몬은 말년에 우상에게 절했습니다. 모든 왕조가 부정된 뒤, 맨 꼭대기에 연한 순으로 오신 진짜 왕 예수 안에서 열방이 깃듭니다. 하나님이 시드기야의 눈을 뽑게 하신 것도 "
인간의 왕은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열 가지 재앙은 하나님이 백성에게 애굽의 실상을 눈앞에서 보이신 사건입니다. 밥으로 먹던 것이 사실은 마귀의 먹이였습니다. 살 만한 곳인 줄 알았던 곳은 사실 전염병과 죽음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장자가 죽었다는 것은 애굽 전체가 이미 죽은 자들의 나라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성도가 이곳을 떠나게 하십니다. 그러니 믿는 사람은 가족도 목사도 교회도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끊어 버리시기 때문입니다. 남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십자가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
나보다 부모와 자식과 재산을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 뜻은 헬라어로는 "미워하라"기보다 "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허벅지를 찔러 가며 가족을 미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돈이 없어 지옥 가는 사람은 없고, 예수가 없어 지옥 갑니다. 자식도 재산도 우리를 천국에 데려가지 못합니다. 평생을 살면서 "정말 예수만이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 곧 덜 사랑하게 되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다음에 부자 청년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에서 이 청년이 가진 것은 '돈'이 아니라 '소유'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청년이 가진 것은 돈보다 자기 의, 곧 "
내가 이만큼 살았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그것은 지금까지 쫓던 율법과 가치를 다 내려놓고 빈손으로 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청년은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이어 베드로가 묻습니다. "
우리는 다 버렸는데 무엇을 얻겠습니까?" 성도의 상은 예수 자신, 곧 영생입니다. 예수님을 앞에 두고 보상을 계산하는 순간, 그는 두 번째 부자가 됩니다. 그래서 이 두 부자의 이야기 바로 뒤에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이어집니다. 하루를 일했든 한 시간을 일했든 똑같이 주어지는 은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