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브리서 11장 24~26절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했고,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첫 줄만 읽으면 왕궁의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은 신앙의 거인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2장의 모세는 다릅니다. 동족이 매 맞는 것을 보고 홧김에 사람을 죽였고, 소문이 나자 바로가 두려워 도망친 사람입니다. 결단이 아니라 줄행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도주를 "믿음으로"라고 부릅니다. 이 한 단어가 본문의 열쇠입니다. 모세가 믿음을 발휘해 애굽을 떠난 것이 아니라, 믿음이 모세를 애굽에서 떠나게 했습니다. 일의 주어는 모세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을 가방 속 도구처럼 생각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고,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믿음은 도구가 아니라 손입니다. 사람이 믿음을 쥐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사람의 손목을 잡고 이끕니다. 말씀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해석해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를 삽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고백도 내가 예수를 잘 닮아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 삶과 입을 통해 은혜와 언약을 설명해 내신다는 뜻입니다.
그날 모세가 그 자리를 지나간 것, 동족이 매 맞는 장면을 본 것, 분을 이기지 못해 손이 나간 것, 소문이 난 것, 어느 하나도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상 2장은 여호와가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죽이기도 살리기도, 병들게도 낫게도 하신다고 노래합니다. 모세를 살인자로 만든 분도, 그 일이 들통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었습니다. 모세를 애굽에서 끄집어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병실 침대에서 "하나님이 나를 돌보지 않으셨구나" 하고 중얼거리는 가장이 있다고 합시다. 이 본문은 다른 문장을 건넵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간섭하셨구나." 앞의 문장은 하나님의 부재를, 뒤의 문장은 임재를 말합니다.
모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저마다 자기의 애굽을 안고 삽니다. 주일마다 "세상의 것을 내려놓으라"는 설교에 아멘으로 답하던 직장인이, 월요일 아침 동기의 승진 소식에 속이 뒤틀리고 퇴근길에 자신을 높여 줄 인맥을 계산합니다. 그는 위선자가 아닙니다.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것이 육을 가진 사람의 실상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애굽에서 걸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개입합니다. 믿음이 들어오면 사람은 세상에서 조금씩 차단당합니다. 이전의 관계가 시들해지고, 좋아하던 자리가 불편해집니다. 마침내 자신이 그려 온 이상적인 교회로부터도 끊어집니다. 쾌적하고 따뜻하며 그곳에 속한 내가 자랑스러운 교회, 그것도 자아를 확장한 또 하나의 애굽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교회는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거룩한 공회, 성도의 교통"이며, 그것은 이미 묵시 속에 완료되어 있습니다. 십사만 사천이라는 완전수는 더하거나 뺄 수 없이 이미 채워진 교회를 뜻합니다. 성도는 선악과를 입에 문 채 이 땅에 옵니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처럼 이미 물린 몸으로 옵니다. 그 가운데 "내가 불뱀에 물린 자가 맞습니다" 하고 고백한 사람들만 놋뱀을 올려다보고 살았습니다. 성도의 첫 고백도 같습니다. 이 세상은 내가 떠나야 할 곳입니다. 그 고백이 시작되면 조금씩 떠나는 걸음이 시작됩니다.
이 '끌려감'의 모양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 사무엘상 6장에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시대였습니다. 성경은 이 시대를 "말씀이 희귀한 시대"라고 적습니다. 제사장도 제사도 멀쩡했지만 말씀이 사라졌습니다. 엘리는 눈이 어두웠고, 그의 아들들은 제물이 삶아지기도 전에 날고기를 빼앗을 만큼 자기 배를 위해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블레셋이 쳐들어오자 이들은 법궤를 앞세우고 나갔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이긴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언약을 소유하면 원하는 승리를 얻으리라는 생각, 믿음을 도구로 쓰려는 마음의 극단입니다. 하나님은 그 법궤마저 빼앗기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법궤를 가져간 블레셋은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신상이 부러지고, 쥐가 들끓고, 역병이 번졌습니다. 두려워진 그들은 법궤를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이제 막 새끼를 낳아 젖이 가득한 암소 두 마리를 골라 새끼를 떼어 놓고 수레에 법궤를 실었습니다. 소는 모성이 가장 강한 짐승입니다. 그런데 법궤가 등에 실리자 소들은 울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곧장 벧세메스로 갔습니다. 사람은 이사야의 말처럼 양같이 각기 제 길로 흩어집니다. 그러나 언약을 실은 소들은 새끼를 두고 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정해진 길을 갔습니다. 가고 싶어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하지만 갑니다. 믿음이 가입하면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벧세메스는 제사장 아론 지파의 땅이었습니다. 거룩한 직분의 땅이지만 이 이야기의 문맥에서는 엘리 시대처럼 타락한 구약 체제를 가리킵니다. 언약궤는 여호수아의 밭에 멈췄습니다. 여호수아는 헬라어로 '예수'입니다. 말씀이 없는 교회에 언약이 도착한 것입니다. 도착하자마자 언약궤를 지고 온 소는 잡혀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성도들은 이 소 안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하늘 보좌를 떠나 눈물로 걸어오신 분이 패역한 신부와 하나 되려고 당신의 백성에게 오셔서 죽으셨습니다. 언약을 맨 소가 죽었기에 그 땅의 더러운 우리가 살았습니다. 소가 두 마리인 것도 뜻이 깊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소 두 마리가 나란히 어깨에 지는 것이 멍에입니다. "내 멍에를 메라"는 말씀은 편안한 초대가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지신 멍에의 한쪽을 이어 지고 같은 방향으로 걷자는 부름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기꺼운 마음으로 공주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내던졌으리라 상상합니다. 그러나 그의 속에는 서운함과 억울함,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있었을 것입니다. 왕자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목동이 되었습니다. 당시 가장 천한 직업이었고, 처가살이로 보낸 세월이 사십 년이었습니다. 게다가 자기 백성을 위해 옳다고 한 일이 그 백성의 고발로 돌아와 쫓겨난 결과였습니다. 사십 년 뒤 하나님이 "가서 네 백성을 건지라" 하셨을 때 모세가 자꾸 뒤로 물러선 것은 겸손해서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삐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믿음은 한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있든 그를 끌고 갑니다. 그리고 훗날 모세는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날의 사건이 없었다면 애굽 궁정에서 호의호식하며 그것이 진짜 가치인 줄 알고 죽었을 것입니다. 당시 역사 속에서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이해되는 순간 그 능욕이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큰 재물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성도의 삶이 도달하는 결론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문장은 여기서 완성됩니다. 실제로 일한 쪽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모세가 다 한 것으로 '여겨' 주십니다. 헬라어 '로기조마이', 곧 계산해 넣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니 이 본문을 읽고 "모세를 본받아 다 버리자"로 결론 내리는 것은 방향이 틀렸습니다. 히브리서 11장 전체의 주어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나눠 주셨더니 누구는 이만큼, 누구는 저만큼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은 신앙의 목적을 착하게 사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실제로 착한 사람은 많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서도 장애인 친구를 매주 차로 모시고, 두 시간 넘게 집회 자리를 지키며 말씀을 끝까지 들어 주고, 생활비를 쪼개 용돈을 보태는 이가 있습니다. 사우나에서 마주친 사람의 팔뚝에는 푸른 문신으로 "착하게 살자"라고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조직 폭력배도 착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인간의 본능적인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 착함은 얼마나 갑니까? 관공서 대기석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묻지도 않았는데 세금을 덜 내려고 차명계좌를 만들러 왔다고 털어놓습니다. 일요일이면 맨 앞줄에 앉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불법을 저지르다 소송에 걸리자 힘 있는 사람을 소개해 달라 매달리고, 다른 쪽에서는 "성도는 성도답게 살아야 한다"며 남에게 목소리를 높입니다. 우리 안에도 같은 모순이 있습니다. 흠 없이 살았다 해도 그것은 결국 자기의 보람, 자기의 자존심을 위한 것입니다. 나머지는 다 잘했으니 이 하나쯤은 눈감아 주시리라는 계산은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를 어기면 전부를 어긴 것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고, 그러니 십자가를 먼저 붙드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도에게 착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 속에서 자기 쾌락만 위해 사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밤늦게 라면에 밥까지 말아 두 그릇을 먹고 누웠을 때처럼 "아, 이건 아닌데" 하는 불편함이 올라옵니다. 이것이 성도의 지향성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안고도 한순간 욱해서 무너집니다. 이때 성도는 배웁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99.9퍼센트만 완성하고 0.1퍼센트를 우리에게 남겨 두었다면, 우리 중 누구도 그 마지막 한 걸음을 채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완료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구나" 하고 고백하며 욕심에서 조금씩 멀어집니다. 변화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하셨다"는 고백이 따라붙습니다.
모세는 고난을 "재물"이라 불렀습니다. 인간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신이 맘몬인데, 본문은 고난이 그 맘몬보다 큰 재물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이란 언약을 등에 지고, 새끼를 뒤로하고, 정해진 길로 끌려가 마침내 그 자리에서 잡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에는 자원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라는 말이 붙습니다. 하나님은 계속 간섭하십니다. 사람 의지하지 마라, 인생 의지하지 마라, 교회 의지하지 마라, 세상 의지하지 마라, 이 요구는 한꺼번에 오지 않고, 붙잡던 것을 하나씩 놓게 하는 방식으로 옵니다. 끌려가는 쪽은 숨이 차고 서럽습니다. 그러나 한참 뒤에 돌아보면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그 일이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구나."
어느 목회자가 마음을 쏟던 사람들이 하나둘 곁을 떠납니다. 배신이라 부르기엔 모호하고 그냥 두기엔 너무 아픕니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 보면, 아무 일 없다는 듯 제자리에서 성실히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같은 편인 척 앉아 있던 이들은 떠났고, 크게 흔들어도 남아서 이 길이 옳다고 붙드는 이들입니다. 인간이 쌓아 올린 공동체를 하나님이 한 번에 흔드실 때, 그 흔들림 속에서 진짜 보석이 드러납니다. 이 길을 평생 가는 사람은 같은 일을 몇 번이고 겪습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토록 달려온 사도가 로마 감옥에서 찾아오는 이 하나 없는 겨울을 맞았고, 마지막 편지의 부탁은 "두고 온 겉옷을 가져오라"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서 그랬듯 다 거두어 가시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렇게 상처를 입고도 그들을 향한 긍휼이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육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마음입니다. "내 안에서 예수가 일하시는구나." 그러나 곧 다시 원망스럽고 밉습니다. 그때 알게 됩니다. 예수가 내게 관계하지 않으시면 나는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말씀이 계속 일하셔서 잠깐이라도 예수의 마음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신앙생활이란 이 반복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 장면이 베들레헴의 구유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가장 먼저 경배한 이들은 광야에서 들잠을 자던 목동이었습니다. 구세주는 정돈된 방이 아니라 냄새나는 짐승의 먹이통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먹이, 우리의 떡으로 오신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로 스스로를 치장한 이들은 끝내 구유 앞에 무릎 꿇을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마음을 말끔히 쓸어 도덕으로 반듯하게 닦아 놓은 집에는 오히려 일곱 귀신이 들어와 앉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삶은 세상이 규정한 착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든 푸른 초장이든, 어린 양이 이끄시는 대로 끌려가는 양이 되는 것입니다. 양은 연약합니다. 방어할 무기도 없고, 파리가 콧구멍에 알을 낳아 구더기가 들끓어도 스스로는 어쩌지 못합니다. 그런 우리를 은혜로 덮어 안전하게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시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의지할 곳은 하나뿐입니다. 은혜, 그리고 십자가입니다. 이 역사 안에는 붙들 만한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도하며 기다립니다. 이 인생이 속히 접히고 이미 완료된 묵시가 눈앞에 펼쳐지기를,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면서 말입니다. 모세가 능욕을 보화보다 크게 여긴 것은 능욕이 달아서가 아니라, 그 길 끝에서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오늘 하루, 끌려가는 걸음 속에서 예수 한 분만 붙들고 걸을 수 있기를, 그분이 우리의 행복의 근원이 되는 하루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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