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히브리서 11:27)
기원전 1500년경, 한 남자가 사막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습니다. 등 뒤에는 그가 자라난 궁전이 있었고, 그 궁전에는 그를 죽이려는 왕의 명령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이것은 흔한 도망자의 이야기입니다. 살인을 저지르고, 발각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국경을 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출애굽기의 기록을 그대로 따라가면, 모세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인 뒤 바로가 그 일을 알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수백 년 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사건을 전혀 다르게 서술합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히 11:27) 두려워서 도망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에서 성경은 지금 사실 관계를 착각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문장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왕의 칼입니까,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인류 역사상 최초의 두려움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 장소는 에덴동산입니다. 창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기 전까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바로 그 순간, 그들은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의 발소리를 듣고 두려워 숨은 것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인과관계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과 후, 달라진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갑자기 무서운 존재로 변하신 것이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인간의 자리였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까지 인간에게 '선'이란 그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판단의 기준이 하나님께 있었기에, 인간이 심판대에 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는 순간, 인간은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인간이 세운 그 기준에 의해 인간 자신이 심판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한 회사에 직원으로 있을 때는 상사의 결정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직원이 스스로 사장 행세를 하며 회사의 모든 규정을 자기 마음대로 만들기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규정을 어긴 책임까지 스스로 떠안게 됩니다. 자기가 세운 법에 자기가 걸리는 것입니다. 선악과 사건은 바로 이런 구조였습니다. 인간이 심판의 기준을 자기 손에 쥔 순간, 그 기준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인간을 겨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이 죽는 것뿐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두려움에 붙들린 인생의 초상을 가장 정직하게 그려낸 사람이 다름 아닌 모세 자신입니다. 그는 시편 90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3~10 발췌)
칠십 평생, 강건하면 팔십, 그 자랑이라 해 봐야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 서 본 사람이라면 이 고백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압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는 한 간호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환자들이 마지막에 두려워하는 건 통증이 아니에요. '내 인생이 도대체 무엇이었나' 하는 물음이에요." 죽음 앞에서 인생을 돌아볼 때, 많은 사람이 마주하는 것은 화려한 성취의 목록이 아니라 이 알 수 없는 공허함과 두려움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좀처럼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깊이 알고 나니 세상의 평가 따위는 전혀 나를 흔들지 못하더라"는 간증을 흔히 듣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면, 이것은 대체로 사실이 아닙니다. 사람은 죽는 날까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다만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그 욕망을 감추고 살아갈 뿐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복음은 비로소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의 문제는 어떻게 풀립니까? 성경은 이 답을 모세의 생애 전체를 통해 미리 보여 줍니다. 모세는 평생 애굽을 두 번 떠났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을 죽이고 도망친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 온 백성을 이끌고 나온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가 구원의 '시작'을 가리킨다면, 두 번째는 구원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사이, 광야에서 보낸 사십 년의 세월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 내어 마침내 하나님 나라로 들이시는 전 과정을 압축해 보여 주는 예행연습과도 같았습니다.
모세가 사람을 쳐 죽이고 도망쳤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서 왕자의 신분과 소유를 모두 벗겨 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를 다시 애굽으로 돌려보내시기 직전, 결정적인 사건 하나를 그의 삶에 심어 놓으십니다.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먼저 몇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창세기 15장,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 방식이 특이합니다. 짐승을 잡아 둘로 쪼개 놓고, 그 사이로 타는 횃불과 연기 나는 화로가 지나갑니다. 고대 근동의 언약 관습에서 이런 의식은 "만약 내가 이 약속을 어기면 이 쪼개진 짐승처럼 되어도 좋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식에서 아브라함은 쪼개진 고기 사이를 지나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상징하는 불과 연기만이 그 사이를 지나갑니다. 언약의 당사자인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를 대신하여 언약을 짊어지신 또 다른 하나님이 쪼개지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예고편입니다.
16장에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힘으로 이루어 보려 한 시도입니다. 그러나 17장에 이르러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리고 명하십니다. "너는 할례를 받으라." 이름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뀝니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순서대로, 율법의 행위를 시도하게 하신 뒤(16장), 그것이 답이 아님을 보이시고 할례를 명하신 것(17장)은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인간의 행위로는 이 언약에 닿을 수 없으며, 오직 죽고 다시 사는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요 12: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막 8:35). 역설적이지만, 구원받기 위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오히려 그 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라는 자리까지 완전히 끌어내리십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비로소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붙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삭이 등장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생물학적으로 도저히 낳을 수 없는 나이에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이삭의 후손이라야 이스라엘"이라고 말합니다. 이삭은 인간의 능력으로 얻은 아들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진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훗날 하나님이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 하신 것은 잔혹한 시험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정말 네 아들이냐, 아니면 내 아들이냐." 아브라함이 그 칼을 들어 올린 것은, "이 아이는 내가 낳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약속으로 주신 것입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자기부인의 원형입니다.
이삭에게서 야곱이, 야곱에게서 열두 아들이 태어나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들이 바로 약속의 후손들입니다. 하나님이 훗날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내 장자를 내놓으라" 명하신 것은, 창세기에서부터 준비되어 온 이 언약을 마침내 성취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출애굽기 4장으로 돌아가서, 모세가 마침내 순종하여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향하는 길, 숙소에서 갑자기 하나님이 나타나 그를 죽이려 하십니다. 언뜻 보면 뜬금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앞서 살펴본 창세기 15~17장의 언약이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이방인 아내 십보라에게서 얻은 아들을 데리고 가고 있었는데, 그 아들이 아직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다급해진 십보라가 돌칼로 아들의 포피를 베어 내자, 모세는 그제야 살아났습니다. 히브리적 사고방식에서 이것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아들이 상징적으로 '죽고' 그로 인해 아버지가 '산'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십보라는 모세를 "피 남편"이라 부릅니다. 원문의 결을 살리면 "아들의 피,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살아난 남편"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건이 이스라엘 전체를 애굽에서 구출해 내시기 직전, 하나님이 모세 개인의 삶 속에 먼저 심어 놓으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는 원리를 모세가 먼저 몸으로 배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원리란 이것입니다. "죽어야 할 자가,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산 것이 아니라, 아들이 대신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산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 사람은 더 이상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자기 공로로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아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언제든 죽은 자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아들의 할례' 안에서 우리가 이미 죽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렇기에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고발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피의 언약을 맺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언약을 어겼습니다. 원칙대로라면 백성 전체가 심판받아야 마땅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어 삼천 명가량이 죽었을 때, 모세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중보합니다. "차라리 나를 주의 책에서 지워 주옵소서." 이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이 중보로 살아난 백성은 그날부터 "나는 본래 죽었어야 할 자"라는 자각을 안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백성은 다시 원망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광야에 불뱀이 나타나 사람들을 물기 시작했습니다. 물리면 죽는 맹독을 지닌 뱀이었습니다. 이 사건 바로 앞에는 마라의 '쓴 물' 사건이 놓여 있습니다. 마셔도 갈증만 더할 뿐 생명을 줄 수 없는 쓴 물이, 하나님이 지시하신 나뭇가지를 던지자 단물로 변했습니다. 이는 앞으로 하나님이 백성을 다루실 방식을 미리 알려 준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우리 속의 죄를 토해 내게 하는 '쓴 물'로 다가온 뒤, 십자가를 믿는 믿음을 통해 비로소 생명의 '단물'이 됩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 가는 백성에게 모세가 부르짖자, 하나님은 뜻밖의 처방을 내리십니다.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라." 살아 있는 뱀을 잡아 가두는 것도, 해독제를 조제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 놋은 늘 심판을 상징합니다(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의 발과 눈을 묘사할 때 등장하는 재료도 놋이다). 놋뱀은 곧 '심판받은 뱀'입니다. 예수님이 훗날 이 사건을 직접 인용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4~15).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뱀의 형상으로 달리셨다는 것은, 먼저 우리에게 "나는 죽어야 마땅한 자"라는 정직한 자기 인식을 불러일으키신 후, 선악의 심판자로 군림하던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이미 심판받아 처리되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놓치기 쉬운 대목이 있습니다. 뱀에 물린 사람이 살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장대까지 힘겹게 기어가는 것도, 놋뱀을 붙잡고 매달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것뿐이었습니다. 응급실에서 심정지 환자에게 제세동기를 사용할 때, 환자 본인이 그 과정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살리는 힘은 전적으로 밖에서 옵니다. 놋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저 밖에서 주어진 것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한 문장으로 수렴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이 구절의 '이처럼'은 바로 앞 절, 곧 광야의 놋뱀 이야기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어루만지고 다독이는 사랑이기 이전에, 우리의 옛 자아를 십자가에 매달아 처리하시는 사랑입니다.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거리와 상점, 심지어 종교와 무관한 공간까지 트리로 장식되고 캐럴이 흘러나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들뜬 분위기 속에서 한 해를 마무리합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 그 탄생이 결국 어떤 십자가로 이어지는지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성탄은 축제이기 전에, 나 때문에 아들이 죽으셔야 했다는 사실 앞에 가슴을 치는 자리여야 합니다. 기쁨과 통곡이 한 자리에 있어야 온전한 성탄입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다." 이 역설을 붙들 때에만, 성탄의 기쁨은 값싼 감상이 아니라 참된 은혜가 됩니다.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모세는 왜 왕의 노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었습니까? 애굽과 바로는 율법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려는 이 세상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의 옛 자아,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며 심판을 자초하던 그 자아를 처리해 놓으셨기에, 사망은 더 이상 우리를 어쩌지 못합니다. 바울이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고전 15:55). 원어의 결을 살리면 "사망아 네 독침이 어디 있느냐"에 가깝습니다. 뱀에게 물려도 놋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던 그 장면과 정확히 같은 구조입니다.
율법이라는 뱀에게 매일같이 물려도, 우리는 그저 십자가를 바라보면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믿음으로' 됩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 곧 헬라어 '피스티스'는 단순히 무언가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신뢰를 넘어, '신실함'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 편에서의 신실하심입니다. 그 신실하심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붙들고 이끌어 갈 때, 그 이끌림 속에 사는 삶이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모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 세운 것은 그의 담대한 성품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곧 보이지 않는 그분을 보는 것같이 붙든 그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인 죽음, 실패, 사람들의 평가, 알 수 없는 미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용기가 아니라, 이미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붙들고 계신 그분의 신실하심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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