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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말씀 묵상

히브리서 - 마른 막대기, 그러나 하나님의 것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18.

히브리서 11장 24~26절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젊어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서른이 되기 전에 대기업 임원 자리에 올랐습니다. 회사는 그의 이름을 딴 프로젝트를 밀어주었고, 그는 자신이 세운 성과로 자신을 증명해 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쌓아 온 모든 것이 회사의 이해관계 앞에서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오히려 사내에서 배신자로 몰렸고, 결국 스스로 회사를 떠났습니다. 이후 몇 년간 그는 이렇다 할 일 없이, 처가에 얹혀사는 신세로 지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
저는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회사에서 쓸모가 있었던 건 제 능력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그 능력을 쓸 자리가 없으니까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흔히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
다시 일어설 수 있어요. 당신은 여전히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세에게 하는 말은 이것과 다릅니다. 성경은 그가 다시 일어서서 무언가를 증명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완전히 끝장난 자리에서, 그를 붙잡은 것은 그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전혀 다른 무엇이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모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이 문장만 놓고 보면 모세는 대단한 결단력의 소유자처럼 보입니다. 왕궁의 안락함을 스스로 걷어차고, 고난받는 히브리 노예들 편에 서기로 결심한 신념의 사람, 오늘날 우리가 성도에게 요구하는 모범적인 신앙인의 모습이 여기에 그대로 겹쳐집니다. "여러분도 모세처럼 세상의 안락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택하십시오." 설교자들은 흔히 이렇게 적용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출애굽기를 펼쳐 보면, 이 그림은 산산이 부서집니다.

모세는 스스로 왕궁을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애굽 사람과 히브리 사람이 다투는 것을 보고 순간의 혈기로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다음 날, 이번엔 히브리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을 말리러 갔다가 오히려 "
누가 너를 우리의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너는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일이 바로의 귀에 들어갔고, 모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그것이 그가 왕궁을 떠난 전말입니다. 결단이 아니라 도피였습니다.

그 후 그는 40년을 미디안 광야에서 처가살이를 하며 양을 쳤습니다. 나이 마흔에 도망쳐 여든이 될 때까지, 인생에서 가장 힘 있고 활동적이어야 할 시기를 남의 집 사위로, 이름 없는 목자로 흘려보냈습니다. 모세 자신이 훗날 쓴 시편 90편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여든이면 인생이 다 저문 나이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어느 날,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그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어 내 백성을 이끌어 내게 하리라." 모세의 첫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나를 보내지 마시고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한마디로, "안 갑니다"였습니다.

히브리서의 진술대로라면, 모세는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좋아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
가서 내 백성을 구원하라"고 하셨을 때 그는 기쁨으로 즉시 응답했어야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야말로 그 고난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는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왜인가요?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를 궁지로 몰아넣은 것이 바로 그 히브리 백성들이었습니다. 자신을 밀고한 것도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들을 구하러 가라니, 모세로서는 억울하고 내키지 않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가 힘 있고 자신만만하던 마흔 살에는 찾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기력이 빠지고, 스스로도 인정할 만큼 "떨기나무" 같은 존재가 되어서야 찾아오셨습니다.

떨기나무란 무엇입니까? 가시가 많고 볼품없어서, 옛사람들은 땔감으로조차 쓰지 않던 나무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 태워 없애는 것 말고는 쓸 데가 없는 나무, 모세는 스스로도 자신이 그런 존재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완강히 버티자, 성경은 "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시니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화를 내실 정도로 고집을 부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 말씀하시는데도 순종하지 않는 것, 이것이 인간의 실체입니다. 이런 인물을 두고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를 위한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이 진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성경은 앞뒤가 맞지 않는 책이 되어 버립니다.

여기에 히브리서 11장을 읽는 열쇠가 있습니다. 성경의 진짜 저자는 성령 한 분이십니다. 1,600년에 걸쳐 마흔 명이 넘는 사람의 손을 거쳐 기록되었지만, 그 모든 기록을 엮어 내신 편집자는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이 장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의 삶도 그 사람이 실제로 살아낸 그대로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의 인생의 행간에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뜻이 도드라지게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장을 읽을 때는 "
모세가 무엇을 했다"가 아니라, "믿음이 무엇을 했다"로 주어를 바꾸어 읽어야 합니다. 모세는 왕자의 자리를 좋아했습니다. 애굽의 보화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그를 찾아와서, 그가 원하지도 않은 그 자리에서 그를 끌어내리고 그가 붙들고 싶었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것이 히브리서 11장이 그려 내는 '믿음'입니다. 이 장을 믿음장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믿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삶에 개입하여 무슨 일을 이루어 내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모세에게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야곱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를 오랫동안 내버려 두신 것처럼 보입니다. 임기응변과 잔꾀로 재산을 모으도록 지켜만 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렇게 쌓아 올린 것을 한꺼번에 흩으시고, 결국 기근이 들자 그토록 피하고 싶어 했던 애굽으로 손을 벌리며 내려가게 만드셨습니다. 아벨과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들에게 양식을 사 먹어야 했던 것처럼, 훗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에돔 사람들에게 물과 양식을 구해야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종종 세상에 아쉬운 소리를 하며 광야를 지나야 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재산과 인맥과 능력으로 인생을 방어할 수 있다고 믿고 사는 동안, 하나님은 그 담을 조금씩 허무십니다. 그가 마지막 하나 남은 것까지 내려놓고 "
저는 이제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자신이 서 있던 자리가 자기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붙드심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믿음이 사람 안에 들어온다는 것은, 그 사람이 붙들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빼앗기는 일과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 방식에는 위험한 함정이 있습니다. 성경을 표면 그대로만 읽으면, 성경 전체가 "
인간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행위의 지침서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모세를 예로 들면, "모세처럼 세상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택하십시오"라는 식의 적용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성경은 위인전과 다를 바가 없어집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안다고 해서 다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성경을 연구하고도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글도 겨우 깨친 채로 몇 장의 복음서를 읽다가 자신의 실체와 하나님의 은혜를 동시에 깨닫고 무릎을 꿇습니다. 이는 인간의 지적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경은 성도만이 진정으로 알아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보기는 보아도 알아채지 못하게, 이는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하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엉뚱하게 왜곡해서 사람을 행위로 몰아가는 그 목소리는 어디서 옵니까? 창세기의 뱀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 "
나하쉬"는 본래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그 뱀이 하와에게 말을 겁니다. 이 대목이 알려 주는 바는, 마귀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을 시험한다는 사실입니다. 마귀는 복음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다가옵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빠지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헬라어로 "
엑수시아", 곧 사람을 하나님께로 실제로 이끌어 가는 힘, 예수를 믿게 만드는 살아 있는 권세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말씀하실 때 사람들이 "그 말씀에 권세가 있다"고 감탄했던 것이 바로 이 엑수시아입니다. 이 힘이 빠진 말씀은, 아무리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어도 사람을 그리스도가 아니라 행위로 끌고 갑니다. 계시록에서 용이 토해 내는 물, 곧 거짓된 말은 결국 다 떠내려가 버리는데, 이는 그 안에 엑수시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마귀의 말은 세상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발견됩니다. 세상은 이미 마귀의 지배 아래 있어 굳이 손댈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자들 사이로 찾아옵니다. 다만 이 마귀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한시적으로 허용하시는 존재이지, 영원한 대적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마귀는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말하면서도 정작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나의 노력과 나의 성취 중심으로 해석하려는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에서도 똑같이 드러납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한 후 "
얼마 동안"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얼마 동안"이라는 표현은 잠시 후 누군가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께는 완결된 시험이지만, 교회에는 계속되는 시험입니다.

첫째 시험,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은 십자가를 나의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로 이용하라는 유혹입니다. 오늘날로 옮기면 이런 모습입니다. 한 성도가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제 사업이 잘되게 해 주세요. 제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붙게 해 주세요"라고만 구한다면, 그는 십자가를 자신의 형통을 위한 부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십자가는 원래 생명의 떡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사건인데, 그것을 "나를 위한 도구"로 축소시키는 순간 복음은 마귀의 말로 변질됩니다.

둘째 시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은 이생의 자랑을 위한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하늘의 영광에서 이 낮은 땅으로 스스로 뛰어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자신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십자가에서 죽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우리 교회는 이렇게 은혜롭고,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며 자신을 증명하려는 유혹에 빠질 때, 이 두 번째 시험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셋째 시험, "내게 절하면 세상 모든 영광을 주겠다"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세상적 형통과 맞바꾸려는 유혹입니다. 십자가까지는 말하되, 그것을 "당신도 이렇게 되게 해 주는 십자가"로 바꿔 설명하는 순간, 그 설교는 복음이 아니라 마귀의 언어가 됩니다. 우리는 지금도 이 세 가지 유혹 앞에서 자주 무너지면서, 그것을 "건강한 신앙"이라 부르며 만족해합니다.

본문의 마지막 구절, "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는 말씀도 다시 살펴야 합니다. 앞선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즉 모세가 스스로 결단하여 고난을 택했다면, 그는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안 간다고 버티다가 억지로 끌려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상은 누구의 몫입니까? 하나님의 몫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이란, 하나님이 볼품없는 마른 막대기 같은 모세를 통해 영생과 구원이라는 하늘의 상을 이루어 내신 하나님 자신의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원리를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한 조각가가 다 썩어 문드러진 나무토막을 가져다가 아름다운 조각품을 만들어 냈다면, 그 작품의 영광은 나무토막의 것이 아니라 조각가의 것입니다. 모세가 신분과 재산을 다 빼앗기고 알거지가 되어 40년을 처가살이로 흘려보낸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죽일 자들을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40일 광야 금식을 견디신 것과 나란히 놓입니다. 이사야 53장이 그리는 마른 막대기 같은 고난의 종의 모습이 곧 그리스도의 모습이며, 하나님의 권능에 온전히 사로잡혀 쓰임 받는 것이 성도의 자리입니다.

예수님도 "
나는 내 뜻대로 말한 적도 행한 적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곧 자신의 영광이라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붙들려 끌려가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애굽을 그리워하며 여전히 발버둥 치는 나를,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나의 영광입니다. 성도의 인생이란 그렇게 하나님께 끌려가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비추어 내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이 원리는 개인의 삶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느 젊은 사역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 "
작지만 진실한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나며 사람이 하나둘 늘고, 프로그램이 많아지고, 건물을 넓혀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자, 그는 어느새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을 모을 것인가"를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사람을 모으기 위해 설교는 점점 더 듣기 좋은 말, 실천하면 복 받는다는 말로 채워졌습니다. 사람들은 좋아했습니다. 교회는 커졌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설교 속에는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힘, 곧 엑수시아가 빠져 있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 교회를 향한 경고입니다. 교회의 머릿수를 자신의 세력으로 삼으려는 순간, 그 교회의 실질적인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이 됩니다. 반면 하나님이 진짜 주인이 되시는 교회는, 반드시 십자가에 달리는 자리를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신다는 것은 그 공동체의 자아, 그 자체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께 완전히 내어드려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 앞에서, 어느 설교자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 있습니다. 저보다 훨씬 많이 공부한 사람들이 세상에 넘쳐납니다. 해마다 신학박사만 수천 명씩 배출됩니다. 그럼에도 왜 하나님은 이토록 부족하고, 솔직히 지금도 편안한 자리를 더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을 붙들어 쓰십니까? 그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어느 신학교에서 강의했을 때의 일입니다. 처음엔 마흔 명 가까이 모였던 학생들이, 한 번 따끔하게 지적한 뒤로는 열다섯 명 남짓으로 줄었습니다. 그런데 남은 열다섯 명 중에는 그의 설교 수백 편을 미리 다 찾아 들은 학생도 있었습니다. 몇 번의 성경공부만으로 눈이 열리는 이들이 생겨났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기적처럼 느껴졌습니다. 반면, 헬라어와 히브리어, 아람어까지 능통한 어느 목회자와 오래 서신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원어 지식은 감탄스러울 만큼 정교했지만, 대화의 끝은 언제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맺어졌습니다. 언어에 통달해도, 하나님이 열어 주시지 않으면 그 안에서 십자가를 끄집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그렇게 확인했습니다.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어떻게 공부해야 성경을 알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딱히 해 줄 답이 없었습니다. 돌아보아도 자신이 무엇을 특별히 잘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성실히 애쓰던 어느 순간, 하나님이 열어 주셔서 보였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성도가 결국 도달해야 할 자리가 여기입니다. "
내가 무엇을 잘해서 지금 이 은혜의 자리에 앉아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정직한 답은 "아니다"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끌고 오셔서, 이 자리에 앉혀 놓으셨을 뿐입니다. 모세가 왕자의 자리를 스스로 버린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를 끌어냈듯, 우리의 신앙 역시 우리의 결단이 이루어 낸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완성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은 몫은 단 하나, 두 손 두 발 다 들고 이렇게 고백하는 것뿐입니다. "
하나님, 감사합니다. 찬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