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브리서 11장 28절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이집트의 어느 집에서 한 가족이 잠들지 못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마당에는 막 잡은 어린양이 있었고, 문설주와 문지방에는 양의 피가 발려 있었습니다. 열 살쯤 된 아들이 물었습니다. "아빠, 우리 집만 왜 이렇게 해요? 옆집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아버지는 한참 만에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단다. 오늘 밤 이 집을 지나가시다가 피가 보이면 그냥 지나가실 거야." 아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이 집 식구들은 특별히 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했을 뿐입니다. 이 밤의 이야기가 히브리서 11장 28절에 짧게 적혀 있습니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 일을 한 사람은 모세입니다. 훗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라고 자랑할 만큼 모세를 높이 받들었습니다. 율법을 받은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처음으로 주신 규례는 율법이 아니라 어린양을 잡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을 "믿음으로" 한 일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가 붙은 일은 모두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월절도 그렇습니다.
그 어린양은 아무 양이나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점도 흠도 없어야 했고, 양 무리 가운데서 나온 양이어야 했습니다. 시장에서 사 올 수 없었습니다. 무리의 대표를 따로 떼어 내어 죽이고 불에 태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식구들은 그 고기를 남김없이 먹었는데, 구원의 양식은 오직 한 분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문에 발랐습니다. 피가 발린 집에는 죽음이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날 밤 이 집이 지켜진 까닭에 이 가족이 한 일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착한 아들이었는지, 부지런한 아버지였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문에 피가 있는지만 보았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생각해 보면 쉽습니다. 구조대원이 던져 준 밧줄을 잡은 사람은 "내가 수영을 잘해서 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밧줄을 던져 준 사람 덕분에 산 것입니다. 이 사실은 믿음이 없으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사람은 늘 "나도 뭔가 보태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한 할머니가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한 번도 빠진 적이 없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냈습니다. 그런데 요즘 마음이 불안합니다. "내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일까?" 누구에게 물어보면 대답은 대개 비슷합니다. "열심히 하시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구원받을 확신이 백 퍼센트가 아니라 백이십 퍼센트였습니다. 그들만큼 열심이던 사람들도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가장 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확신이 있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뜻밖에도 성경이 알려 주는 표지는 이것입니다. 모든 일이 내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빼앗았던 하나님의 궤를 돌려보내려고, 젖 나는 암소 두 마리에게 수레를 매어 보냈습니다. 새끼를 두고 가야 하는 암소들은 울면서도 곧장 벧세메스로 갔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는데도 끌려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한 멍에에 두 마리가 함께 매이는 것처럼, 내가 간 길을 너희도 가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며 걸으신 분입니다. 그 멍에를 같이 멘 사람의 길이 늘 편할 리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랬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종살이를 했지만 먹을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곳에서 이스라엘을 끌어내어 광야로 데려가셨습니다. 광야에는 집도 밭도 없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이웃 나라에게 값을 치르고 사야 했습니다. 훗날 백성은 광야에서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투덜거렸습니다. 성도의 삶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편안한 곳에서 끌어내어 당신이 정하신 길로 이끄십니다.
중학교 교실에는 반마다 규칙이 있습니다. 규칙을 잘 지키면 칭찬을 받고, 못 지키면 벌을 받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는 착한 아이"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어른의 세계에도 도덕과 윤리와 법이 있습니다. 모두 사람들이 서로 살기 위해, 또 자기 체면을 지키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으로 구원받을 자격을 따질 수는 없습니다.
뱀들의 무리에도 그들만의 질서가 있을 것입니다. 뱀이 그 질서를 아주 잘 지킨다고 해서 우리가 그 뱀을 예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만든 기준으로 자신을 꾸미는 일도 이와 비슷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치장해도 아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율법을 왜 주셨을까요?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건져 내셨고, 그 뒤에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만 건져 내려 하셨다면 순서가 반대였을 것입니다. 율법은 거울이었습니다. "너희의 원래 모습이 이렇다. 그러니 너희는 어린양의 피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비춰 주는 거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거울 앞에서 놀라 엎드리는 대신 화장을 합니다. 얼굴의 얼룩을 가리려고 합니다. 오늘의 교회도 그런 모습이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중세 교회는 구원 위에 사람의 행위를 쌓아 올렸습니다.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사면 죄가 줄어든다고 했고, 성인들의 공로를 나누어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처음 모양대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십자가 은혜 위에 "거룩해져야 한다", "더 헌신해야 한다"는 요구가 조금씩 얹힙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의 수준을 비교하게 되고, 교회는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구원은 비교가 필요 없는 자리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같은 자리에서 은혜로 삽니다. 예수 밖에서는 늘 경쟁과 비교가 있습니다.
구원은 닮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흙으로 빚은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은 본래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닮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어 보려고 선악과에 손을 뻗은 것이 처음 타락이었다는 점을 기억해 볼 만합니다.
그렇다고 구원받은 사람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먹으면 믿음이 약한 형제가 걸려 넘어질 것 같으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고기 한 점은 사치였고, 형제를 아끼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이미 기차가 출발을 했습니다. 행선지는 천국으로 정해져 있고, 그 기차 안에 있는 승객이 무엇을 한다고 해서 기차의 방향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 기차에 타게 되었을까" 하는 마음을 가진 승객은 다른 승객을 불편하게 하는 일을 스스로 삼가게 됩니다.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알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말씀을 보여 주시기도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가장 사랑하는 아내를 하루아침에 잃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사람들 앞에서 울지도 말고 원망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예루살렘과 성전이 무너질 것을 미리 보여 주시려는 일이었습니다. 그 자리는 사실 하나님의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대신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주시고 눈물을 참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거두어 가시며 구원의 길로 이끄십니다.
어느 교회에 오래 다닌 한 분이 있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수석을 했고, 음악도 잘해서 어디서든 사람들이 찾았습니다. 하고 싶은 일은 다 하며 살던 그가 어느 날 큰 병을 진단받았습니다. 수술을 받고 항암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그가 쌓아 온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했던 착한 일들도 이상하게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병실에 누워 그의 마음에 남은 생각은 하나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주지 않으셨다면 큰일 날 뻔했구나."
그는 오랜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이 한마디만 전했습니다. "내게 십자가의 예수를 전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건강하고 힘이 있을 때는 죽음이 먼 이야기 같고, 십자가도 절박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나씩 거두어 가시고 "네 것 가운데 내가 기뻐 받을 것이 무엇이냐" 물으실 때,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주인이 강아지를 혼내 방 안에서 오줌을 못 누게 가르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강아지가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주인 발소리만 들려도 놀라 달아나는 강아지의 모습을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로 그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두들겨 패서 예수와 비슷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창조의 말씀으로 더 이상 자라야 할 것이 없는 완전한 존재를 지으시는 곳입니다. 그때까지 이 땅에서 우리는 자기를 위해 사는 삶이 얼마나 어둡고 쓸쓸한지를 배우게 됩니다. 아프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하고, 세상에서 별 대접을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 길 위에서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하루는 "구원받는 사람이 적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애써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애쓰는 사람은 예배당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와 은혜를 전하면 사람들이 몰려들 것 같지만, 오히려 있던 사람도 떠납니다. 사람의 능력과 자존심이 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을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고 부릅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살 사람이 세상이 생기기 전에 이미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들리는 사람은 자기가 잘나서가 아니라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듣는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혔고, 요한은 밧모 섬으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때로 아무도 없는 자리로 끌고 가십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성경은 이것을 구원이라 부릅니다. 그날 밤 이집트의 그 집에서 해가 뜨자 아들은 문설주에 말라붙은 붉은 자국을 보았습니다. 옆집에서는 울음소리가 났지만 이 집은 무사했습니다. 아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아빠, 우리가 착해서 살았어요?" 아버지는 문설주의 자국을 가리키며 대답했습니다. "아니란다. 저 피 때문이야."
그 대답이 오늘 우리에게도 같습니다. 우리는 착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피 때문에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대단한 열심이 아니라, 그 피를 바라보며 "나는 예수 때문에 삽니다" 하고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도 하나님이 주셔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드릴 말씀은 이것뿐입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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