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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말씀 묵상

히브리서 - 믿음이 건너게 하셨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1. 3.

히브리서 11장 29절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수백만 명이 바다 앞에 멈춰 섰습니다. 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홍해가 있었고, 뒤에서는 바로의 병거와 군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겁에 질려 모세에게 따졌습니다. "
애굽에 무덤이 없어서 우리를 광야에 끌고 와 죽이려 합니까? 차라리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게 낫다고 내가 그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수백 년 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장면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다." 이 말을 처음 듣는 사람은 고개를 갸웃합니다. 원망하고 소리치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믿음으로'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기자가 출애굽기를 읽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알면서도 그렇게 썼다면, 우리가 믿음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이 어딘가 틀렸다는 뜻입니다.

장마철에 불어난 개울 앞에 한 아버지와 여섯 살 아이가 서 있습니다. 물살이 거세서 아이 혼자서는 도저히 건널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리자 아이는 울며 발버둥 칩니다. "
싫어, 무서워! 아빠는 왜 나를 여기로 데려왔어!" 아이는 아버지의 팔을 때리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이를 놓지 않고 그대로 개울을 건넙니다. 건너편에 닿았을 때 누가 이 아이를 건너게 했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분명합니다. 아이의 용기가 아니라 아버지의 두 팔입니다. 아이가 울었든 웃었든, 아버지를 믿었든 의심했든 결과는 같았습니다. 아이는 아버지 품 안에 있었기 때문에 건넜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믿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용기가 아니라, 우리 밖에서 우리를 안고 목적지까지 데려가는 힘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약속'이라고도 부르고, 그 약속으로 우리를 지켜 가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노아의 홍수 때 방주가 풍랑 속에서 사람들을 지켰던 것처럼, 믿음은 우리가 올라타 있는 방주입니다. 우리가 안전한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방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건지려 하셨는데, 왜 일부러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뒤쫓아 오게 하셨을까요? 구원이 목적이었다면 바로를 막아 주고 편안하게 건너게 하시면 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바다와 군대 사이의 막다른 골목에 세우셨습니다.

건강검진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몸이 아프다는 걸 모르던 사람도 엑스레이를 찍으면 병이 드러납니다. 검사가 병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병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의 원망이 그랬습니다. 그것은 새로 생긴 불신이 아니라, 원래 있던 그들의 실상이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애굽을 나온 이들이었지만, 위기가 닥치자 곧바로 "
애굽이 낫다"고 외쳤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바다를 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럴 만한 자격을 보여서가 아닙니다. 430년 전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브라함도 약속을 처음 들었을 때 웃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웃으며 속으로 '말도 안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아브라함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점이 없었다는 점에서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약속을 스스로 이루셨을 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먼 옛날 사람들의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원망했습니다. 그는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
죽이기로 작정된 자처럼" 행렬의 맨 끝에 세우셨다고 썼습니다. 옛날 로마의 개선 행진에서 맨 끝은 사로잡힌 포로들이 끌려오는 자리였고, 구경꾼들은 그들을 조롱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같은 길을 가던 동료에게 등을 돌림당한 바울에게는 자신이 꼭 그런 처지로 느껴졌던 모양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을 영웅처럼 높이고 싶어 하지만, 바울도 우리와 똑같이 힘들어했던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
모세 안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모세 안에서'라는 말은 그 밖에 있으면 죽는다는 뜻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들을 모세 안에 넣어 건너게 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바닷가에서 모두 죽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받기 전의 우리만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 모습이기도 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는 일입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바다를 건너는 동안 날마다 이것을 경험합니다. 열심히 해도 내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내 힘과 내 의가 무너지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것이 아프고 서러운데,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 삽니다. 믿음은 우리를 대단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려고 오지 않았습니다.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생명을 주려고 왔습니다.

우리는 흔히 "
저 사람은 믿음이 좋다, 저 사람은 믿음이 약하다"고 말합니다. 마치 성적표처럼 믿음을 점수로 매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은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 하나의 믿음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목적지까지 끌고 갑니다. 믿음이 강하다, 약하다는 말은 믿음을 얼마나 이해했느냐를 가리키는 표현일 뿐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동의를 구하지 않습니다. 홍해 앞의 이스라엘은 동의하지 않았고, 아브라함은 웃었습니다. 그래도 믿음은 그들을 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믿음을 자꾸 자기 점수표로 바꾸려 합니다. 믿음을 얻었으니 이제 얼마나 훌륭하게 살 수 있는지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시급을 받고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처럼, 기도한 시간만큼, 헌금한 만큼, 봉사한 만큼 갚아 달라고 하나님께 청구서를 내미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실제로 그렇게 말합니다. 지키면 복을 받고 어기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다 지킬 수 없었기에 예수님이 대신 지켜 완성하셨고(마 5:17), 그 복을 값없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니 "
내가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 주세요"라는 기도를 고집하려면, 지금도 소와 양을 끌고 성전에 가야 합니다. 그것은 이미 지나간 길입니다.

그래서 참된 성도는 때때로 열심히 살고도 세상이 말하는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험을 합니다. 그것이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맞는 길입니다. 우리를 끌고 가는 분이 믿음이시지, 우리의 열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고 나서 감사하며 잘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쓰다고 원망하고,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했습니다. 애굽 군대가 바다에 빠져 죽은 것을 보고도 "
저들은 우리와 무엇이 달랐기에 죽었나" 하는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사실은 하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도 애굽과 똑같은 사람들이었고, 다른 것은 오직 약속이 있었다는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약속이 이들을 가나안 문 앞까지 끌고 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차피 죄인이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약속에 안겨 건너온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감사와 찬송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와 찬송이 조금씩 삶을 바꿔 놓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받은 사람은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삶이 일관되고 흔들림이 적습니다. 내가 이룬 것으로 나를 증명하려는 신앙이 아니라, 안겨서 건너온 사람의 신앙입니다.

지금 자기만의 홍해 앞에 서 계신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믿음이 약해서 두렵고, 원망이 올라오는 분들께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건너게 하는 것은 당신의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당신을 안고 계신 분의 팔이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