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라디아서 5장 13~15절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어느 회사에 특별한 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달 초, 직원들에게 이번 달 목표 실적을 나눠주는 대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 달 여러분의 월급은 이미 통장에 들어갔습니다. 무엇을 해내야 받는 게 아니라, 이미 받은 것입니다." 처음엔 직원들이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몇몇 직원들이 오히려 불안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럼 저는 뭘 해야 하죠? 뭔가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들은 이미 받은 것을 누리기보다,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십자가 앞에 선 우리의 모습이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보탤 것이 없는, 완성된 세계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노력하면 보상받는다"는 구조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시험을 잘 보면 칭찬을 받고, 일을 잘하면 승진을 하고, 착하게 굴면 인정을 받는, 그런 세상에 평생 몸담아 온 우리에게 "너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복음은 오히려 걸림돌이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십자가를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만 자기 몫을 만들어 보태려 합니다. 주일을 잘 지켰다, 십일조를 정확히 냈다, 봉사를 열심히 했다, 이런 것들로 은근히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복음은, 회사 사장이 이미 입금한 월급처럼, 우리가 무엇을 하기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구원입니다.
몇 해 전, 오랜 수감 생활 끝에 풀려난 한 노인의 이야기가 뉴스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정작 바깥세상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밥을 주지 않고, 정해진 규칙이 없는 삶이 오히려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작은 규칙을 어기고 감옥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자유를 얻었지만, 자유를 누리는 법을 몰랐던 것입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오해가 있습니다. 바울이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이렇게 읽습니다. "너무 방종하지 말고, 율법과 규율을 잘 지키며 겸손하게 남을 섬겨라."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지만, 이것은 또 하나의 율법을 만들어낸 것에 불과합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불안해서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려는 노인처럼, 은혜의 자유를 받고도 다시 스스로 규율을 만들어 그 안에 갇히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우리의 편의나 기쁨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신 구원의 완성을 드러내기 위한 자유입니다. 마치 빚을 다 갚아준 은인의 이름을 부끄럽지 않게 하려고 새 삶을 사는 사람처럼, 우리의 자유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자유케 하신 그분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전쟁 직후,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한 고아원에 모였습니다. 서로 고향도 다르고 사투리도 다르고 성격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도무지 마음이 맞을 리 없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이 아이들은 서로를 "형제"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형제로 만들었을까요? 마음이 맞아서도, 성격이 비슷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같은 원장님 아래서,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지붕 아래서 살아가는 그 하나의 사실이 그들을 형제로 만든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형제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서로 마음이 맞아서, 혹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애써 만든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동일한 은혜와 구원, 곧 어린 양의 피로 우리를 씻기시고 한 가족으로 삼으셨기에 형제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형제 관계 안에서는 누구도 "내가 더 열심이었다", "내가 더 옳았다"고 자기 행위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고아원의 아이들이 원장님의 사랑 앞에서 서로의 출신이나 능력을 자랑할 수 없듯이, 한 아버지로부터 같은 구원을 받은 우리는 오직 아버지가 하신 일만을 자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이 문장을 읽을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오해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서 율법을 완성해야 한다는 뜻이구나."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해서 율법을 이루라는 명령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 곧 십자가의 완성안에서 이미 사랑의 율법이 이루어졌다는 선언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할까요? 인간의 본성으로는 남을 나보다 높이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한 부부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결혼 초기, 이 부부는 "서로 배려하며 살자"는 다짐을 매일 되뇌었지만, 정작 사소한 일로 자주 다퉜습니다. 배려는 결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나 남편이 큰 병을 앓고, 아내가 헌신적으로 그를 돌보는 시간을 지나면서 부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서로를 향한 사랑은 "이렇게 사랑해야지"라는 결심이 아니라, 함께 겪은 은혜와 용서의 시간 속에서 저절로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성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이 들어오면, 우리는 더 이상 "내가 옳다", "내가 정당하다"고 내세울 필요가 없는 무장해제의 상태에 이릅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그 밤을 떠올려 보십시오.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지 다투던 제자들 앞에서, 주님은 가장 낮은 자의 자리로 내려가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리를 다툴 필요가 없어집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용서라는 동일한 은혜 아래 있는 종들이기에, 서로 간에 우열도 주인도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두 형제가 부모의 유산을 두고 다투는 이야기는 흔히 듣는 이야기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다툼에서 양쪽 다 "나는 옳다"고 확신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부모님을 더 잘 모셨다", "나는 더 많은 희생을 했다" 각자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순간, 형제는 서로를 물고 뜯는 원수가 되고 맙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주일을 잘 지켰다, 십일조를 정확히 했다, 봉사를 오래 했다, 이런 것들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근거로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고 남을 비난하거나 판단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바로 바울이 경고한 "서로 물고 먹는" 행위입니다. 부모의 유산을 다투는 형제처럼, 은혜의 유산을 받은 우리도 자기 의를 내세우는 순간 서로를 삼키는 원수가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입니까? 성도는 자신의 믿음이나 행위를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우리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십자가의 자리로 늘 다시 이끄시는 믿음 안에서, 주님의 피와 용서의 풍성함을 계속해서 누리며 사는 것, 그것이 갈라디아서 5장이 우리에게 주는 초대입니다. 자유는 내가 지켜야 할 새로운 규칙이 아니라, 이미 다 이루신 그분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향해 무장을 해제하고 걸어가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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