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라디아서 5장 16~18절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한 노인이 평생 성경을 읽었습니다. 매일 새벽 무릎을 꿇고 말씀을 폈고, 밑줄과 메모로 성경책은 너덜너덜해졌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년은 두려움과 정죄로 가득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이것밖에 안 되는가." 성경을 펼 때마다 자신의 실패 목록이 늘어났습니다. 반면 같은 성경을, 같은 구절을 읽고도 눈물로 감사하며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책인데 왜 누구에게는 저주가 되고 누구에게는 생명이 될까요?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그 답을 말합니다. 성경이 생명의 책이 되느냐 저주의 책이 되느냐는, 그것을 읽는 눈이 성령을 받은 눈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문제는 성경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읽는 나의 상태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렇게 반응합니다. "그러면 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십시오. 그러면 그대로 행하겠습니다." 마치 다이어트 코치에게 식단표를 받아 들듯, 우리는 신앙생활의 매뉴얼을 원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육신의 생각'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 행위로 나의 정당함을, 내 믿음의 우월함을 증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육신입니다. 새벽기도를 몇 번 나갔는지, 헌금을 얼마나 했는지, 전도를 몇 명에게 했는지를 세어가며 "나는 괜찮은 성도다"라는 자기 확신을 쌓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육신의 생각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율법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반응은 "나는 졌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무릎 꿇는 것인데, 육신의 생각은 끝끝내 율법을 통해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시험에서 낙제한 학생이 답안지를 놓고 "그래도 내가 맞은 문제도 있지 않느냐"며 억울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험의 목적은 애초에 그의 실력을 드러내는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17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며 흔히 이렇게 상상합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육신의 욕망과 싸워 이겨주셔서, 나를 죄짓지 않는 선한 사람으로 자동 개조해주실 것이라고, 마치 백신을 맞으면 몸속에서 항체가 저절로 바이러스를 물리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것은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너희가 원하는 것"이란 바로 "내가 믿음 좋은 성도가 되고 싶다"는 그 욕망 자체입니다. 성령은 바로 그 욕망을, 그 계획을 못 이루게 막으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무너진 사업을 다시 일으키겠다며 빚을 내려 할 때, 그 계획이 성공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짜 사랑일까요? 만약 그 계획이 성공한다면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될 것입니다. 진짜 사랑은 때로 그 계획이 좌절되게 두어, 아들이 스스로는 안 된다는 것을, 결국 아버지께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데 있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만약 성령이 내 힘으로 선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신다면, 나는 내가 실패자라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은 나를 성공한 성도로 만들어주시는 대신, 내가 얼마나 안 되는 사람인지를 끊임없이 마주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우리를 실패에 방치하시는 냉정한 분일까요? 전혀 아닙니다. 성령이 오신 목적은 처음부터 성도를 위대하거나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목적은, 인간이 불가능한 존재이며 실패자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깨닫게 하여, 내 힘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용서와 은혜만을 바라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는 결국 이런 고백만 남습니다. "나는 자랑할 것이 없다. 나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다." 이것은 자기비하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고백에 이른 사람만이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비로소 알게 됩니다. 마치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가 "저는 건강합니다"라고 우기는 동안에는 의사의 처방을 받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위독합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비로소 치료가 시작됩니다.
18절은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스스로 믿음을 책임지려 하고, '믿음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태도는 결국 두 얼굴을 낳습니다. 잘 안 될 때는 두려움과 정죄를, 조금 잘 될 때는 오만을 낳습니다. 이것이 율법 아래의 삶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있는 성도는 다릅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나 가치에 스스로를 매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그 자리 안에서, 참된 기쁨과 자유와 감사를 누립니다. 매일 자신의 성적표를 확인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이미 합격 통지서를 받아 쥐고 감사하며 걷는 삶입니다.
성경을 펼 때마다 자신을 정죄하던 그 노인에게 필요했던 것은 더 많은 실천 목록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단 하나의 고백, "나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 이루셨습니다"였습니다. 그 고백에 이를 때, 같은 성경, 같은 성령이 저주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우리를 옮겨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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