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라디아서 6장 1~2절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한 작은 교회에 오래 다닌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성경을 정말 열심히 읽는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잠언을 읽다가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는 구절에서 무릎을 쳤습니다. "그래, 부지런해야지. 개미처럼 일찍 일어나 성실하게 살면 되는 거야." 그는 그날부터 새벽같이 일어났고, 마음속으로 늦잠 자는 이웃들을 슬며시 흉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집사님의 이야기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문제가 하나 숨어 있습니다. 성경이 너무 쉽게 읽혔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술술 읽히고 "맞아, 나는 이렇게 살면 되겠네" 하고 고개가 끄덕여질 때가 사실은 가장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잠언의 개미 이야기는 처세술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성실할 수 없는 인간, 아무리 애를 써도 게으르고 악한 인간의 실상을 거울처럼 비추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칭찬하려고 쓰인 책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드러내려고 쓰인 책입니다.
이 교회에 어느 날 소문이 돌았습니다. 청년부 임원 하나가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이 술렁였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렸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우리는 저러진 않지."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은근한 안도감이 있었습니다.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는 안도감이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사람을 나눕니다. 죄를 지은 사람과 짓지 않은 사람, 실수한 사람과 반듯한 사람, 범죄를 저마다의 개별적인 행위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전혀 다른 그림을 보여 줍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후손인 우리는 모두 똑같은 뿌리에서 나온 똑같은 죄인입니다. 다만 어떤 사람은 죄가 밖으로 드러났고, 어떤 사람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유리창이 깨진 집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웃집 창문은 멀쩡하다고 해서 그 집이 돌에 안 맞는 집인 것은 아닙니다. 아직 돌이 날아오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은 똑같습니다. 화를 내지 않았으니 나는 괜찮다, 율법을 잘 지켰으니 나는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의롭다 여기는 망상에 빠집니다. 그 순간 남을 심판하는 자리에 앉게 됩니다. 바울이 같은 구절에서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경고한 것은 바로 이 자리를 두고 한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그런데 신령한 자가 누구일까요? 흔히 기도를 많이 하고 행실이 경건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한 신령한 자는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기 안에서 나올 것이 죄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안에서 아무것도 찾지 않고 오직 주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피만 바라봅니다.
신령하다는 말이 '내가 잘났다'가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를 알게 되었다는 뜻이라는 것은 놀라운 역전입니다. 그러니 신령한 자의 마음은 온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보면서 자기 안의 죄를 함께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작은 교회에서 실수한 청년부 임원에게 한 권사님이 찾아갔습니다. 처음에는 그 권사님도 "내가 가서 따끔하게 충고해서 사람 하나 바로 세워야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마주 앉으니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문득 자기 마음속에 있던 것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품어 온 미움, 말하지 못한 욕심, 사람들 앞에서 꾸며 온 얼굴, 권사님은 한참 말없이 앉아 있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아요. 우리 같이 주님 앞에 나아가요."
이것이 '바로잡는다'는 말의 참뜻입니다. 이 말은 의사가 환자의 뼈를 맞추듯 형제의 행실을 고쳐 놓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을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의 교만한 망상입니다. 바로잡음이란 너와 내가 똑같이 죄에 속한 자임을 알고, 함께 주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고치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고 오직 주님의 몫입니다.
2절은 이어서 말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이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리라." 한겨울 산길에서 무거운 배낭을 지고 가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비틀거리자 다른 사람이 말했습니다. "내가 들어 줄게." 그런데 사실 그 사람의 배낭도 터지기 직전이었습니다. 자기 짐도 감당하지 못하면서 남의 짐을 들어 주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우리는 자기 죄의 짐 하나도 스스로 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서로의 짐을 질 수 있을까요?
답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지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 모두의 짐을 이미 십자가에서 대신 지신 분이 계십니다. 서로의 짐을 진다는 말은 내가 네 죄를 해결해 주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둘 다 같은 처지의 죄인으로서 함께 십자가 아래 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짐을 부려 놓은 그 자리에 다른 사람도 같이 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리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열심히 사랑을 실천하고, 율법을 지키고, 신앙의 업적을 쌓아서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어 내라는 말인가 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이고, 그 사랑은 이미 완성된 율법입니다.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믿음 좋은 사람과 믿음 약한 사람을 나누는 곳이 아닙니다. 누가 더 많이 행했는지 점수를 매기는 곳도 아닙니다. 교회는 스스로 이룰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오직 십자가의 사랑에 매여 그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하는 곳입니다.
그해 겨울, 그 작은 교회의 예배당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실수했던 청년이 앞자리에 앉았고, 그 옆에 개미 말씀에 무릎을 쳤던 집사님이 앉았습니다. 집사님은 더 이상 새벽에 일어난 것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느 날 조용히 고백했습니다. "나는 개미가 아니라, 개미를 흉볼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같은 찬송을 불렀습니다. 거기에는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용서받은 죄인 둘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이 바울이 말한 '성취'입니다. 우리가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은혜 앞에 함께 서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짐을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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