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라디아서 5장 19~21절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흔히 장례식장에서 듣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이 땅에 묻히고 결국 흙이 된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물론 틀린 해석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는 그보다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처음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지만 흙덩이로만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그는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령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세상에 드러내며 사는 존재입니다. 흙으로 만든 그릇에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순간 그릇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담던 그릇이 자기 자신만 담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이 상태를 "육신"이라 부릅니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씀은 죽은 뒤에 있을 일이기 전에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아담은 그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생령에서 자기만 아는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그림은 뱀에게 내려진 저주와 이어서 볼 때 더 또렷해집니다. 하나님은 뱀에게 "너는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하셨습니다. 뱀이 문자 그대로 흙을 먹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흙, 곧 육신으로 사는 인간이 사탄의 먹이가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잃고 자기만 위해 사는 사람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뱀의 밥상 위에 올라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은 육체의 일을 열다섯 가지로 나열합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입니다. 이 목록을 읽을 때 우리는 대개 시험지를 받은 학생처럼 행동합니다. 하나하나 훑으면서 속으로 표시합니다. 음행? 나는 아니다. 우상숭배? 아니다. 주술? 당연히 아니다. 술 취함? 가끔 회식 자리에서 좀 마셨지만 취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열다섯 개 중 열두 개쯤에 동그라미를 치고 나면 슬며시 안도합니다. "이 정도면 나는 괜찮은 편이구나."
건강검진 결과지를 받아 든 사람의 마음과 비슷합니다. 수치 스무 개 중 세 개만 정상 범위를 벗어났으니 그리 나쁘지 않다고 위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록은 건강검진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밝히는 진단서입니다. 진단서의 결론은 몇 개가 해당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애초에 흙으로 지어진 존재라는 데 있습니다. 물에 빠진 두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은 수심 이 미터에, 다른 사람은 오 미터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수영을 전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이 미터든 오 미터든 결과는 같습니다. 이 미터에 빠진 사람이 오 미터에 빠진 사람을 보며 "나는 저 사람보다 덜 깊이 빠졌다"고 자랑한다면 우스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일이 정확히 그것입니다. 나는 음행은 안 했으니, 나는 우상숭배는 안 했으니, 하며 서로 깊이를 견주고 있습니다.
더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아주 자주 들리는 말입니다. "육체의 일을 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서 천국에 갑시다." 듣기에는 참 좋은 권면입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독이 있습니다.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에덴에서 뱀이 속삭인 이야기의 다른 버전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 스스로 선을 만들 수 있다는 착각이 바로 선악과의 뿌리입니다. 천국 가려고 열심히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가르치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선악과를 손에 쥐게 됩니다. 그런 설교가 겉으로 아무리 경건해 보여도 그 뿌리는 사탄의 유혹입니다.
육체의 일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열다섯 가지가 결국 한 뿌리에서 나왔음을 알게 됩니다. 그 뿌리는 "자기를 위한 탐욕"입니다. 음행은 다른 사람의 몸을 내 만족을 위해 취하는 것이고, 시기는 남이 가진 것을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이며, 분쟁과 당 짓는 것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입니다. 술 취함과 방탕은 내 쾌락을 위한 탐닉이고, 우상숭배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신마저 도구로 삼는 일입니다. 겉모습은 열다섯 가지로 달라도 속은 같습니다. 전부 내가 중심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가장 세련된 선도 이 뿌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런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성도가 남을 돕고, 봉사하고, 겸손하게 처신합니다. 그런데 속으로는 '나는 참 겸손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겸손은 자랑거리가 되어 버립니다. 겸손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나를 높이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도덕도, 의로움도, 겸손도 "내가 이만큼 한다"는 마음이 스며드는 순간 육체의 일이 됩니다. 육체의 일 목록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도 그 훌륭함을 자기 이름으로 쌓으려 하면 같은 뿌리에서 나온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바로 이 절망의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스스로 의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흙이고, 죄인이고, 내게서는 선이 나올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셨다고 합니다. 언뜻 잔인하게 들리지만 여기에는 깊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사방이 막힌 방에 갇힌 사람은 출구를 찾다가 탈진하고 나서야 자기 힘으로는 나갈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나올 수 있다는 환상을 끝까지 버리지 못할까 봐 문을 모두 닫으셨습니다. 이제 남은 문은 하나뿐입니다. 그 문 앞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약속"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면 겸손과 온유는 어떻게 얻습니까? 내가 겸손해지려고 애써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낮아지신 분을 바라볼 때 겸손이 거기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온유하셨고, 나를 대신하여 순종하셨고, 나를 대신하여 낮아지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의 의가 내 의가 됩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고 감사할 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당장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믿음이 얼마나 커야 합니까?" 입양된 아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부부가 아이를 입양하러 갔습니다. 아이는 성적표도 없고 착한 일 기록도 없습니다. 부부는 아이가 얼마나 예의 바른지, 밥은 잘 먹는지 시험해 보고 나서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데려왔고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이의 입에서 "아빠"라는 말이 처음 나옵니다. 아이가 "이제 아빠라고 불러야겠다" 하고 결심해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이미 아들로 삼아 주신 사랑 가운데서 저절로 터져 나온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들의 영을 부어 주셔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아들이 되는 조건은 우리의 행위도, 자격도, 믿음의 크기도 아닙니다. 부르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고, 아들로 삼으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많은 성도가 걸려 넘어지는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6절입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고." 그런데 성도인 나는 여전히 화를 내고, 시기하고, 실수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 안에 있지 않은 것입니까? 나는 가짜입니까?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은 예수 안에 있어도 육체의 일이 여전히 나타납니다. 성도의 삶에서 죄가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범죄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성도가 행위에서 완전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의 피와 용서의 능력이 우리의 죄를 덮어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가 있어도 죄 없다 여겨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 있는 은혜입니다.
오히려 진짜 범죄는 다른 데 있습니다. "나는 내 힘으로 선을 행해서 의를 만들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의를 두고 내 의를 더 보태겠다는 것은 십자가 은혜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뱀이 처음부터 이끌던 길입니다.
우리는 변덕스러운 존재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월요일에 "호산나"를 외쳤고, 금요일에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오늘 뜨겁게 결단한 마음이 내일이면 식어 있고, 아침에 굳게 다짐한 사람이 저녁에는 무너집니다. 그러니 나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존재로 세우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헛수고입니다. 인간은 흙이고, 흙은 신뢰할 수 있는 재료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의 본분은 자신의 부족함을 헤아리며 염려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믿음이 약하다고 자책하는 것도 결국 내 믿음을 붙들고 있는 마음입니다. 성도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자격 없는 죄인을 아들 삼아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나 대신 다 이루신 의를 바라보며 감사하고 자랑하는 일입니다.
흙은 흙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자리에서, 모든 것 되신 분이 나를 붙들고 계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의 입술에는 이 고백이 남습니다. "나는 흙이지만, 아무 자격 없는 나를 아들 삼으신 그분의 십자가가 나의 유일한 자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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