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라디아서 5장 25~26절, 현대인의 성경.
"만일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산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난 체하지 말고 서로 다투거나 미워하지 맙시다."
시골 작은 마을에 오래된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교회에는 '김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새벽기도회는 십오 년째 개근이었고, 주일 예배 때는 늘 맨 앞줄 오른쪽 세 번째 자리에 앉았습니다. 십일조는 월급날 아침에 가장 먼저 떼어 두었고, 식당 봉사에 청소 당번, 성경 필사까지 빠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수첩에는 큐티 날짜가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김 집사님은 이상한 일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새로 등록한 청년이 자기보다 먼저 새벽기도회에 와 있는 것을 본 날,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특하다는 생각보다 먼저 올라온 것은 '저 친구, 얼마나 가나 보자'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날 밤 집사님은 잠자리에 누워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오래 달려왔는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을 갈라디아서 5장 25절과 26절은 이 질문 앞에 서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낸 갈라디아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어느 때부터인가 율법을 지켜야 하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그 말에 쉽게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할례는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내 안에 믿음이 정말 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눈에 보이는 증명서를 갖고 싶어 합니다. '할례를 받았다, 절기를 지킨다, 음식 규례를 지킨다.' 이런 것들은 '나는 하나님 편이다'라고 보여 주기에 좋은 도장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었으나, 속을 들여다보면 "나는 이만큼 믿는 사람이야"라고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이천 년 전 갈라디아에만 해당할까요? 예배당 안을 둘러보면 모습만 달라졌을 뿐 같은 장면이 보입니다. '십일조를 했다, 주일을 지켰다, 봉사를 했다, 큐티를 했다.' 모두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어느 순간 '내 믿음의 성적표'가 되어 버립니다. 마음이 불안한 날에는 성적표를 꺼내 봅니다. "이만큼 했으니 괜찮겠지." 그러면 잠시 마음이 놓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할례에서 찾았던 위안을, 우리는 다른 이름의 행위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성적표에는 이상한 힘이 있습니다. 한번 갖게 되면 다른 사람의 성적표가 궁금해집니다. 누구는 더 일찍 나오고, 누구는 더 많이 드리고, 누구는 더 오래 기도한다는 소문이 귀에 들어옵니다. 내가 앞서 있으면 은근히 우쭐해지고, 뒤처져 있으면 마음이 쓰라립니다.
바울은 26절에서 이 마음을 정확히 짚습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며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헛된 영광이란 속이 빈 영광, 곧 허영입니다. 믿음 좋다는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 남보다 한 걸음 앞서 있다는 확인을 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자리 잡으면 교회는 기이한 곳이 됩니다. 함께 찬송하는 사람이 경쟁자로 보이고, 은혜 받은 이야기가 자랑으로 들립니다. 남이 잘되면 속이 불편하고, 남이 넘어지면 슬쩍 위로가 됩니다.
김 집사님이 그날 밤 느꼈던 불편함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새벽 제단에서 누구보다 오래 엎드렸지만, 그 자리를 지켜 온 힘이 '감사'였는지 '자리 지키기'였는지 집사님은 처음으로 헷갈렸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비교하지 않습니다. 받은 것이 너무 커서 옆 사람의 몫을 헤아릴 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교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내가 내 공로를 세기 시작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더 겸손해져야지. 더 사랑해야지. 비교하지 말아야지."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성경은 인간이 마음먹는다고 그렇게 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장면을 한번 그려 보십시오. 물에 빠져 숨이 넘어가는 사람에게 누군가 "수영을 열심히 배우면 살 수 있다"고 외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가라앉은 사람에게 그 말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수영 강습이 아니라 물에서 건져 올려 주는 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선을 행할 능력이 모자란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는 건질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사랑의 매'쯤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덕적으로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때리시는 회초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5장 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십자가는 고쳐 쓰는 곳이 아니라 죽는 곳입니다. 나쁜 습관 몇 가지를 손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를 세우려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거기서 끝난다는 선언입니다. 이 말은 처음 들으면 서늘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입니다. 성적표를 들고 불안해하던 사람에게 "그 성적표는 이미 십자가에서 찢어졌다"고 말해 주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25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여기서 '산다'는 말과 '행한다'는 말의 순서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먼저 사는 일이 있고, 그다음에 행하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행해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살리셨기에 그 삶을 따라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요? 흔히 '더 영적으로, 더 뜨겁게, 더 열심히' 사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정반대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너는 참 잘하고 있다"고 속삭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죽은 자'임을 드러내십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구나." 이 고백이 우리 입에서 나오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의 눈을 돌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을 보게 하십니다.
시골 장터에서 한 할머니가 빚을 갚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고 해 봅시다. 장부에는 할머니 이름이 빨간 글씨로 적혀 있습니다. 할머니는 날마다 푼돈을 모아 조금이라도 갚아 보려 하지만, 이자가 불어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와서 말합니다. "어머니, 제가 다 갚았습니다." 영수증을 내밀고 장부의 이름에 줄을 그어 버립니다. 이때 할머니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남은 푼돈을 계속 모으는 일이 아닙니다. 아들이 갚았다는 말을 믿고, 그 사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감사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이 이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지키고 행하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이미 행하신 일을 온전한 의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신앙은 '내 삶에서 무엇을 더 보여 드릴까'가 아니라 '이미 받은 것 앞에서 어떻게 입을 다물고 감사할까'에 가깝습니다.
이쯤에서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럼 새벽기도도, 십일조도, 봉사도 다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서 있는 자리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어머니가 차려 주신 밥을 먹는 두 아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 아이는 밥값을 치르려고 설거지를 합니다. 다른 아이는 사랑받는 아이라서 설거지를 돕습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접시를 닦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의 아이는 설거지를 하는 내내 마음이 무겁습니다. 혹시 부족하지 않을까, 형이 더 많이 했으면 어쩌나 헤아립니다. 뒤의 아이는 그런 계산이 없습니다. 이미 받은 것이 있으니 하고 싶어서 합니다.
김 집사님은 그날 이후 새벽기도에 계속 나갔습니다. 달라진 것은 새벽 제단에서의 첫마디였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 제가 오늘도 왔습니다"였다면, 이제는 "하나님, 오늘도 제가 아니라 주님이 저를 붙들고 계셨네요"였습니다. 앞자리에 앉은 청년을 보아도 더는 마음이 뒤틀리지 않았습니다. 그 청년도 자신처럼 죄인이고, 자신처럼 건짐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장부에서 자기 이름이 지워진 것을 아는 사람은, 다른 이름이 장부에 남아 있는지 따질 이유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5절과 26절은 두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실은 하나의 길을 보여 줍니다. 성령으로 사는 길은 헛된 영광을 내려놓는 길입니다. 헛된 영광을 내려놓는 길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 서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나를 대신해 모든 것을 이루신 주님의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오늘 우리 손에 쥔 성적표가 있다면, 그것을 내려놓아도 괜찮습니다. 이미 지워진 이름은 더 지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높은 곳을 바라보며 비교하는 일이 아니라, 십자가를 올려다보며 감사하는 일입니다. 그 감사가 우리의 새벽을, 우리의 헌금을, 우리의 섬김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어서 조용하고, 받은 것이 커서 넉넉합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오늘 이 고백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나는 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다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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