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라디아서 5장 22~24절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해마다 12월이면 거실에 트리가 서고, 가지마다 빨간 사과 장식이 달립니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나무입니다. 하지만 그 트리는 단 한 번도 사과를 맺은 적이 없습니다. 누군가 가져다 매달았을 뿐입니다. 뿌리가 없으니 생명도 없고, 생명이 없으니 열매는 장식에 그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종종 이 트리가 됩니다. 사랑해야 한다고 배우면 사랑을 한 알 사다가 가지에 답니다. 오래 참아야 한다고 들으면 인내를 한 알 매답니다. 주일 아침에는 제법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러나 월요일 아침 출근길 정체와 저녁 식탁의 말다툼 앞에서 장식은 툭툭 떨어집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쓴 편지는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합니다. 그는 "성령의 행위"라 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라고 썼습니다. 열매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맺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앞 절(5:17)에서 성도의 내면을 싸움터로 묘사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마음이 곧바로 고요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믿고 나서야 비로소 이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믿기 전에는 싸울 일이 없었습니다. 육체가 하자는 대로 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 연륜이 쌓일수록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원하지 아니하는 악은 행하는도다." 이것은 신앙이 식어서 나오는 탄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기에 나오는 탄식입니다.
이 싸움 앞에서 우리의 첫 반응은 대개 같습니다. 더 열심히, 더 굳게 결심하는 것입니다. 연초의 다짐, 새벽기도 결단, 금식 작정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해법을 의지력에 두지 않습니다. 열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께 순종하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걸을 때, 그 걸음의 자리에 열매가 맺힙니다.
과수원 주인에게 물어보면 대답은 단순합니다. 사과나무가 열매를 맺으려고 용을 쓰는 법은 없다고 합니다. 나무가 하는 일은 뿌리를 땅에 두고, 가지를 줄기에 붙이고, 해와 비를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때가 되어 열매가 열립니다. 가지가 줄기에서 잘려 나오면 아무리 힘을 써도 한 알도 맺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신 말씀이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일은 열매를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붙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 아래 앉고, 기도로 숨을 쉬고, 성령께서 가시는 방향으로 한 걸음씩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순종을 애쓰는 일이 아니라는 말은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을 따라 걷는 것은 분명한 걸음입니다. 다만 그 걸음의 힘과 열매의 공로가 내 것이 아님을 아는 걸음입니다.
본문의 "열매"는 단수입니다. 아홉 개의 과일이 아니라 한 열매의 아홉 단면입니다. 이를 하나님, 이웃, 자신과의 세 관계로 나누어 보면 우리 삶의 지도가 선명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랑, 희락, 화평입니다. 이 셋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먼저 사랑을 지어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확증하신 사랑이 먼저 있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환경과 무관한 기쁨을 맛보고, 심판이 아닌 화평 가운데 서게 됩니다. 성적이나 실적, 통장 잔고에서 나오는 기쁨은 오르내리지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소식에서 나오는 기쁨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웃과의 관계는 오래 참음, 자비, 양선입니다. 이 영역은 가정에서 가장 먼저 시험받습니다. 결혼 3년 차의 어느 부부가 있습니다. 아내는 퇴근한 남편이 현관에서 신발도 벗기 전에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것이 서운하고, 남편은 들어서자마자 쏟아지는 하루치 불평이 버겁습니다. 두 사람 모두 교회에서는 점잖은 성도입니다. 그러나 같은 집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면 오래 참음은 가장 먼저 바닥이 납니다. "내가 참아 준다"는 생각은 곧 상대를 판단하는 자리로 올라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인내심 훈련이 아니라 이 질문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얼마나 오래 참음을 받아 온 사람인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위에 서 있는 자만이 배우자의 연약함 앞에서 같은 방식으로 서 보려는 마음을 얻습니다. 자비와 양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받은 자가 베푸는 친절은 우월감에서 나오지 않고 동병상련에서 나옵니다.
자신과의 관계는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가장 다루기 어려운 상대는 결국 나 자신입니다. 밤늦도록 손에서 놓지 못하는 스마트폰, 끊겠다고 수없이 다짐한 습관, 한마디 던져 놓고 곧바로 후회하는 말버릇을 생각해 보십시오. 절제를 의지의 문제로만 보면 우리는 승리와 패배, 자만과 자책 사이를 오갑니다. 하지만 성경은 절제도 열매라고 말합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를 다스리려는 시도는 결국 나라는 왕이 나라는 신하를 다스리는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참된 절제는 왕이 바뀔 때 시작됩니다.
23절 끝에서 바울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법은 금하는 데는 능합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고 막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말라는 법은 없고, 온유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법은 "하지 말라"로 죄를 억누를 수는 있어도 "사랑하라"고 명령한다고 사랑이 생기게 하지는 못합니다. 율법은 거울이어서 우리의 얼룩을 비추지만, 얼굴을 씻기는 비누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매 없음 때문에 낙심한다면, 그것은 율법의 거울이 제 일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거울은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데려가기 위해 있습니다. 거울 앞에서 계속 화장만 고치고 있다면 거울의 목적을 놓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매의 뿌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은 24절에서 가장 중요한 선언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시제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못 박겠다는 결심이 아니고 지금 못 박고 있는 중이라는 진행도 아닙니다. 이미 일어난 사건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기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육체를 죽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을 믿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 오래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이 있었습니다. 독재자는 매일 아침 이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고, 백성은 두려워 그 명령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독재자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이제 백성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처형된 독재자의 명령에 계속 복종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랜 습관 때문에 여전히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돕니다. 그때 소식을 믿는 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 목소리는 이제 아무 권한이 없다." 육체의 소욕이 우리 안에서 여전히 소리를 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십자가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자의 마지막 목소리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날마다 자기 정욕을 이기려고 싸우기 전에 먼저 이 복음 앞에 다시 서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 선언 위에서만 우리의 싸움은 패배가 예정된 싸움이 아니라 승리가 확정된 싸움이 됩니다.
그리고 이 못 박음은 자기 주권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합니다. 육체의 소욕의 밑바닥에는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는 선언이 깔려 있습니다. 십자가는 그 왕좌에서 내가 내려오고 예수께서 앉으시는 자리입니다. 내가 왕이던 때에는 사랑도 평안도 내가 만들어 내야 했지만, 그분이 왕이 되시면 그분이 맺게 하십니다.
여기까지 오면 아홉 가지 열매가 사실은 한 분의 얼굴이라는 것이 보입니다. 사랑은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고, 화평은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신 분의 평화입니다. 오래 참음은 우리를 기다려 주신 분의 인내이고, 온유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신 분의 성품입니다. 절제는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마침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분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열매는 결국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삶이며, 우리가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곧 그분이 우리 안에서 얼굴을 드러내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자랑은 "내가 이만큼 맺었다"가 아니라 "그분이 이렇게 맺게 하셨다"입니다. 혹시 오늘 자신의 가지를 보며 낙심하고 있습니까? 열매는커녕 잎사귀 몇 장이 전부인 것 같고, 사랑하지 못하고 참지 못하고 절제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습니까? 그 괴로움이 있다면 이미 성령께서 당신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 자리에서 가지를 흔들며 열매를 쥐어짜지 말고 줄기를 바라보십시오.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 접붙여졌고, 이미 성령께서 그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열매는 나무가 맺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나무는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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