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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레위기

레위기 - 기름이 닿는 자리마다, 관유와 거룩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8.

레위기 8장 10~13절

10   모세가 관유를 가져다가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11   또 제단에 일곱 번 뿌리고 또 그 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12   또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발라 거룩하게 하고
13   모세가 또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히고 띠를 띠우며 관을 씌웠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


시내산 기슭, 막 세워진 성막 앞에 사람들이 모여 서 있었습니다. 모세의 손에는 작은 기름 그릇이 들려 있었습니다. 몰약과 육계, 창포와 계피, 거기에 감람기름을 더해 하나님이 일러 주신 그대로 만든 관유였습니다. 광야 한가운데인데도 그릇 가까이에서는 향내가 났습니다. 이 기름은 어디에서 사 올 수도 없고 누가 흉내 내어 만들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레시피까지 정해 주셨고, 일반 사람의 몸에는 붓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출 30:22~33). 그러니 이 기름은 처음부터 '평범한 것'과 '거룩한 것'의 경계선 노릇을 하도록 만들어진 물건이었습니다.

레위기 8장 10~11절에서 모세는 이 기름을 먼저 성막에 바르고, 그 안의 모든 기구에 바릅니다. 제단에는 일곱 번을 뿌리고, 물두멍과 그 받침에도 바릅니다. 이 장면을 가만히 보면 하나 걸리는 데가 있습니다. 제단도 물두멍도 결국 사람이 만든 물건입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 같은 장인들이 나무를 깎고 금과 놋을 두드려 만들었고, 재료를 모은 것은 애굽에서 빠져나온 종들이었습니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 만들었어도 공방에서 막 나온 물건일 뿐입니다. 그런데 기름이 닿는 순간 이것들은 '쓸 만한 기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문화재가 지정되는 장면을 떠올려 보면 좀 더 쉽게 와닿습니다. 시골 할머니 댁 뒤란에 오랫동안 장독 뚜껑으로 쓰던 낡은 항아리가 있었다고 합시다. 어느 날 전문가가 찾아와 그 항아리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보물로 지정됩니다. 그날 이후 항아리는 유리 진열장 안으로 들어가고, 아무도 함부로 만지지 못합니다. 그런데 항아리가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금이 간 자리도, 그을린 자국도 그대로입니다. 달라진 것은 항아리에 대한 선언 하나, 그 항아리를 보는 눈 하나입니다. 성막 기구들이 그랬습니다. 거룩은 물건 안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위에서 부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점을 놓치면 이 본문 전체가 '열심히 닦으면 광이 나는 이야기'로 읽히고 맙니다.

12절은 이야기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합니다. 모세가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붓고 발라 거룩하게 합니다. 시편 133편은 이 장면을 머리 위의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으로, 수염에서 옷깃까지 흘러내린다고 노래합니다. 기름은 한 방울 톡 찍는 것이 아니라 흘러내릴 만큼 부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머리 아래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달라는 백성의 성화에 못 이겨 그 일을 도운 사람입니다(출 32장). 이 위임식은 그 사건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립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기름을 받을 만한 이유를 따진다면 아론에게서는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성막의 제단이 공방 출신이었듯 아론도 죄인의 무리 가운데서 나온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고르시고,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십니다.

이런 일은 사람의 세계에서도 가끔 있습니다. 한 아이가 고아원에서 한 부부에게 입양되는 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날 법원에서 서류에 도장이 찍히고 호적에 새 이름이 올라갑니다. 아이는 그날 갑자기 착해지지도, 똑똑해지지도 않았습니다. 여전히 밥을 흘리고 이불에 실수도 합니다. 그래도 아이는 이제 '누구네 집 아이'가 되었습니다. 자격이 생겨서가 아니라 선택받아서입니다. 아론에게 부어진 기름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 기름은 "
네가 이만큼 되었으니"라는 포상이 아니라 "내가 너를 택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읽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마 한 가지 의문을 품었을 것입니다. 기름을 부어 세운 이 제사장도 결국 죄인인데, 죄인이 죄인을 위해 드리는 제사가 정말 마지막일 수 있을까? 아론도 그 아들들도 죽었고, 그 뒤를 이은 대제사장들도 차례로 죽었습니다. 기름 부음은 끝없이 이어졌지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한 분을 기다리게 합니다. 히브리어로 '기름부음 받은 자'를 '마쉬아흐', 곧 메시아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마다 사실은 "
기름 부음 받은 예수"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씀을 읽으시고 이 말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했다고 하셨고, 사도행전 10장 38절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이 기름 부음 받은 분이 어디로 가셨습니까? 아론은 성막의 휘장 안으로 짐승의 피를 들고 들어갔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피를 들고 들어가셨습니다. 아론은 먼저 자기를 위해 제사를 드려야 했지만, 예수님은 그러실 필요가 없는 흠 없는 분이셨습니다. 기름은 이 한 분에게서 비로소 그림자가 아닌 실체를 만났습니다. 아론에게 부어진 기름은 "
한 분이 오실 것이다"라는 약속이었고, 예수님에게 부어진 성령은 "그분이 오셨다"는 성취였습니다.

여기서 이야기는 우리 쪽으로 옵니다. 시편 133편의 기름이 머리에서 수염으로, 수염에서 옷깃으로 흘러내렸다면,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어진 기름은 어디까지 흘러내렸을까요? 신약은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요한일서 2장 27절은 "
너희는 그에게서 받은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고"라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21~22절에서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하게 하시고 기름을 부으신 이가 하나님이시라고 밝힙니다. 구약에서는 대제사장 한 사람의 머리에만 부어졌던 기름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흘러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교회를 향해 "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라고 부릅니다(벧전 2:9). 월요일 아침 만원 버스에서 졸고 있는 직장인도, 아이 이유식을 만들다 한숨을 쉬는 엄마도, 시험 걱정에 한밤중까지 책상에 앉은 학생도 이 호칭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어느 한 사람의 신앙이 특별히 깊어서 얻은 호칭이 아니라,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부어진 기름이 흘러내려 그 몸에 속한 자들에게 닿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용히 안도하게 됩니다. 우리의 거룩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매일 점수를 매기며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어제는 기도를 빠뜨렸고 오늘은 화를 냈으니 거룩에서 몇 점 깎였다고 계산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성막의 제단이 자기 힘으로 거룩해진 것이 아니고, 아론이 자기 공로로 기름 받은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거룩도 우리의 행위에서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그 기름이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우리에게 닿았기에 우리는 이미 구별된 자입니다. 이 기름은 낡은 항아리에 닿은 지정 선언처럼, 입양 서류에 찍힌 도장처럼 한 번 선언되면 우리의 컨디션에 따라 오락가락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물을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성경의 대답은 그 반대입니다. 거룩은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이미 받은 신분이고, 그 신분이 삶을 바꿉니다. 입양된 아이가 새 아버지 집에서 식탁 예절을 배워 가는 것은 쫓겨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아니라 그 집의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죄와 씨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별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별된 자로서 그 신분에 걸맞지 않은 것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우리를 붙드는 힘은 우리의 의지력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곧 그 기름 부음입니다.

모세의 손에서 기름이 흘러내리던 그날, 제단도 물두멍도 아론도 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저 서 있었고, 기름이 닿았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거룩하다는 것 역시 우리가 해낸 일의 기록이 아닙니다. 기름 부음 받은 그분에게서 우리에게까지 흘러내린 은혜의 기록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거룩해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기름이 닿았기에 서 있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