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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레위기

레위기 - 신실하지 못하여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3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하되 곧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의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훔친 것이나 착취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잃은 물건을 주운 것이나, 그 거짓 맹세한 모든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그는 또 그 속건제물을 여호와께 가져갈지니 곧 네가 지정한 가치대로 양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제물을 위하여 제사장에게로 끌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받으리라."(레위기 6:1~7)

몇 해 전, 한 다큐멘터리에서 국적 없이 떠도는 난민 아이들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어느 나라의 여권도 없었습니다. 영토도, 국민도, 주권도 없이 그저 국경과 국경 사이 어딘가에 존재했습니다. 카메라 앞에서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
저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 그 질문은 단순한 국적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뿌리에 관한 물음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는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사람들이 모이고, 땅을 정하고, 법을 세우고, 스스로 주권을 선언합니다. 미국도, 일본도, 심지어 대한민국도 그렇게 세워졌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힘으로 세운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사람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이삭에게 이어진 약속, 야곱에게 확증된 약속, 그 약속 하나로 시작된 나라입니다. 땅도 없고, 군대도 없고, 심지어 그 시작에는 자손조차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어 늙도록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출발점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렇게 특별하게 세우실 것이었다면, 왜 그들을 굳이 애굽에 보내 430년이나 노예로 살게 하셨을까요?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사업체를 물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부유하게 자라 세상 물정을 모른다면, 사업을 물려받는 순간 모든 것을 탕진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일부러 아들을 가장 밑바닥부터 일하게 했습니다. 남의 밑에서 월급을 받아보고, 무시도 당해보고, 돈이 없어 쩔쩔매는 경험을 하게 했습니다. 훗날 아들이 회사를 물려받았을 때, 사람들은 그 아들이 원래부터 특별해서 성공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성공은 아버지의 계획이었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애굽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사고방식을 가진 노예가 되었습니다. 우상을 보고, 애굽의 문화 속에 젖어들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그 노예의 자리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이 특별히 도덕적이거나 거룩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노예근성에 젖은, 우상숭배에 익숙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자격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의 약속과 신실하심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훈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증거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불교든, 바알 신앙이든, 아세라 숭배든, 그 형태는 다양하지만 목적은 놀랍도록 같습니다. 사람들은 신을 자기 자신을 위해 섬깁니다. 복을 받기 위해, 재앙을 피하기 위해, 자기 자녀가 잘되기 위해, 결국 '나의 안녕'을 위해 신 앞에 나아갑니다.

한 상인이 매일 아침 가게 문을 열기 전에 작은 신상 앞에 절을 하고 향을 피웁니다. 그에게 그 신은 자신의 장사를 잘되게 해주는 도구였습니다. 신이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이스라엘, 곧 오늘의 교회는 정반대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자기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구원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 방향이 뒤바뀌는 순간, 신앙은 곧바로 이방 종교와 다를 바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레위기 6장에 나오는 죄의 목록은 우리 일상과 매우 가깝습니다. 이웃의 물건을 속여 빼앗거나, 강탈하거나, 남이 잃어버린 물건을 주워놓고도 시치미를 떼며 거짓 맹세하는 일들입니다. 생각해보면 참 흔한 일입니다. 회사에서 거래처 물건 값을 슬쩍 낮게 후려치는 일, 남이 놓고 간 우산을 슬쩍 가져가는 일, 빌린 돈을 안 갚으려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일, 우리는 이런 일들을 그저 '양심의 문제', '도덕의 문제'로 여기기 쉽습니다.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전혀 다르게 규정합니다. 이런 행위들을 단순한 윤리적 흠결이 아니라 "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한 것"이라고 못박습니다. 이웃에게 저지른 죄가 곧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로 직결되는 것입니다. 이웃의 지갑에 손을 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에 손을 댄 것입니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보이는 두 가지 반응인 끝까지 잡아떼며 부인하는 것과, 마지못해 인정하는 것, 이 둘 다 결국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한 학생이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하다가 걸렸습니다. 처음에는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뗐습니다. 그런데 증거가 명백해지자 마지못해 인정했습니다. "
제가 잘못했어요. 하지만 다른 애들도 다 그렇게 해요." 겉으로는 죄를 인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자기를 방어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부인할 때도 자기를 지키려 한 것이고, 인정할 때도 실은 자기를 변명하며 지키려 한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렇습니다. 죄를 부인하든 인정하든, 마음 깊은 곳의 동기는 언제나 '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내세우거나, 어떻게든 죄인이라는 사실을 피해가려는 그 모든 몸부림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진짜 신실함은 자기를 지키려는 그 본능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레위기의 규례는 구체적입니다. 죄가 드러난 그날, 피해를 보상하되 원래 물건 값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주어야 합니다. 100만 원짜리 물건을 훔쳤다면 120만 원을 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흔히 오해합니다. "
그렇게 손해를 더 보면 죄값을 다 치른 것 아닌가?" 그러나 성경의 의도는 전혀 다릅니다. 이 오분의 일은 죗값을 완전히 청산하기 위한 벌금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너는 이 죄값을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죄인이다"라는 사실을 만인 앞에 증거하는 통일된 규례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실수로 이웃집 유리창을 깼습니다. 유리창 값만 물어주면 될 것 같지만, 법이 정한 규례는 유리창 값에 벌금을 더해 물게 합니다. 그 벌금은 유리창 수리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
네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공적으로 확인시켜주는 표식입니다. 오분의 일은 그런 의미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죗값을 갚아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얼마나 철저히 죄인인지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그런데 레위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오분의 일을 더해 물건 값을 갚는 것으로 죄 문제가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흠 없는 숫양을 끌고 가서 속건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피의 제사가 있어야만 비로소 속죄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입니다. 아무리 물질로 배상하고, 아무리 노력으로 대가를 치르려 해도, 죄의 문제는 결코 물건이나 돈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죄값은 반드시 피로써 치러져야 합니다. 생명의 값은 생명으로만 갚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스스로 자기 죗값을 치를 수 없습니다. 은행 잔고를 다 털어도, 평생 선행을 쌓아도 죗값은 갚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흠 없는 속건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우리가 갚을 수 없던 그 빚을, 그분이 자신의 생명으로 대신 갚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결론이 나옵니다. 모든 성도의 죗값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동일하게 계산됩니다. 평생을 신실하게 산 사람의 죄나, 인생의 절반을 방황하며 산 사람의 죄나, 십자가 앞에서는 똑같이 그리스도의 피로 계산됩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오랫동안 봉사해온 장로님과,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청년이 나란히 성찬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
이 두 사람이 마시는 잔은 정확히 같은 잔이구나. 장로님이라고 더 진한 은혜를 받는 것도 아니고, 청년이라고 더 묽은 은혜를 받는 것도 아니구나." 바로 이것이 복음의 평등함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신앙 경력이나 도덕적 수준으로 사람을 줄 세울 수 없습니다. 모두가 동일하게 죄인이었고, 모두가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이방 종교와 복음의 결정적인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방 종교는 더러운 자를 스스로 씻고 다듬어서 신 앞에 그럴듯한 모습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정결 예식을 치르고, 금식을 하고, 선행을 쌓아 신 앞에 설 만한 자격을 갖추려 애씁니다.

그러나 성경의 복음은 정반대의 길을 제시합니다. 자신이 더럽고 무능한 죄인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더러운 모습 그대로 속건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씻고 나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씻지 못한 채로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받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온몸에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놀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지혜로운 부모는 "
씻고 들어오라"고 문 앞에서 내쫓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더러운 모습 그대로 안아주고, 집 안에서 씻겨줍니다. 하나님도 그러하십니다. 우리가 정결해진 다음에 나아오라 하지 않으시고, 더러운 모습 그대로 나아오게 하신 후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주십니다.

그렇다면 신실한 성도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것은 자기 행위나 의로움을 하나님께 내밀며 인정받으려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깨닫는 그 순간을 은혜와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죄가 드러나는 것이 어떻게 은혜일 수 있을까요? 그러나 생각해보면, 죄가 드러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정말 버리셨다면 굳이 우리의 죄를 드러내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시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녀의 죄를 드러내어 그리스도의 피 앞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여호와께 신실한 성도는 자신의 선행이나 자격을 근거로 삼지 않습니다. 오직 나를 대신하여 죗값을 치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은혜, 그 하나만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에게 죄가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을 수치로 여겨 숨기려 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피 앞으로 나아가는 은혜의 초대로 받아들이길 원합니다. 신실하지 못한 우리를 끝까지 신실하게 붙드시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