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앞 여호와 앞에 드리되, 그 소제의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소제물 위의 유향을 다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그 나머지는 아론과 그의 자손이 먹되 누룩을 넣지 말고 거룩한 곳 회막 뜰에서 먹을지니라. 그것에 누룩을 넣어 굽지 말라 이는 나의 화제물 중에서 내가 그들에게 주어 그들의 소득이 되게 하는 것이라 속죄제와 속건제 같이 지극히 거룩한즉, 아론 자손의 남자는 모두 이를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서 대대로 그들의 영원한 소득이 됨이라 이를 만지는 자마다 거룩하리라."(레위기 6:14~18)
어느 날,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했습니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그는 예수님이 자신의 편에 서서 형을 꾸짖어 주시기를, 정의로운 재판장이 되어 자신의 몫을 되찾아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누군가 나서서 시비를 가려주기를 바랍니다. 형제간의 재산 다툼, 직장에서의 부당한 대우, 인생에서 받은 손해들, 우리는 늘 "내 몫"을 찾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그리고 곧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유산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 즉 탐심이라는 병을 정확히 짚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세속적 문제를 풀어주는 해결사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자체를 다루러 오신 분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마주해야 할 불편한 진실이 있습니다. 탐심은 노력으로 없앨 수 있는 나쁜 습관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오늘부터 술을 끊겠다"고 결심하는 것만으로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듯, 인간은 "오늘부터 탐심을 버리겠다"고 결심하는 것만으로 탐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느 성도님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저는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 하려고 애썼어요. 새벽기도도 나가고, 헌금도 드리고, 봉사도 했어요. 그런데 왜 제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남과 비교하고, 여전히 더 갖고 싶어할까요?" 이 고백은 정직합니다. 문제는 그가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의 본성 자체가 자기 힘으로는 자신을 고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더 열심히 하라"가 아니라 "네 열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내 의지로, 내 행함으로 하나님을 잘 믿어서 복을 받겠다는 그 생각 자체,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거짓된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적 열심마저도 부인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레위기 6장에는 소제에 대한 규례가 나옵니다. 곡식 가루와 기름을 섞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인데, 그 중 일부는 불살라 드리고, 남은 것은 제사장과 그 자손들이 회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제사장이 그 떡을 먹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백성보다 더 거룩하거나, 더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규례, 곧 은혜의 법에 의해 거저 주어진 것입니다.
마치 한 회사에서 신입 사원이 아무런 실적 없이도 첫 월급을 받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놀랍게도,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음에도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 것처럼, 제사장의 몫은 그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심에 근거했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누룩을 넣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누룩은 부풀리는 성질을 가졌습니다. 조금만 넣어도 반죽 전체를 부풀게 만듭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 이 누룩을 "묵은 누룩", 곧 자기 자랑과 자기 의로 해석합니다. 우리 신앙에 아주 조금이라도 "내가 잘해서", "내가 노력해서"라는 생각이 섞이면, 그것은 온 신앙을 부풀리고 왜곡시킵니다. 순수한 은혜에는 인간의 공로가 한 톨도 섞여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떡을 먹는 장소가 회막 뜰이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그곳은 제물이 불살라지고 연기가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곳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떡을 먹으면서도 그 연기를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나는 본래 저 제물처럼 죽어야 할 존재였다"는 사실을 매 순간 되새기며 먹는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신학적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레위기의 제사 제도는 반복되는 제도였습니다. 매일, 매주, 매년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의 몫이 어떻게 "영원한 소득"이 될 수 있을까요? 제사가 반복된다는 것은 그 제사가 불완전하다는 증거이기도 한데 말입니다.
바로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가 외치는 답이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더 이상 반복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제사였습니다. 마치 오래된 빚을 조금씩 나누어 갚던 사람이 어느 날 은인을 만나 빚 전체를 단번에 청산받는 것과 같습니다. 더 이상 갚을 것이 없습니다.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 청산은 완결되었고, 영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단번에, 영원히 완결된 제사이기에, 그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몫도 영원합니다. 우리가 매일 새롭게 자격을 갖춰야 얻는 몫이 아니라, 이미 완결된 그리스도의 공로 위에 영원히 서 있는 몫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또 하나의 비유가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부터 일꾼을 고용하고, 아홉 시에도, 열두 시에도, 심지어 저녁 다섯 시에도 일꾼을 데려다 일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날이 저물었을 때,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도, 하루 종일 일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우리는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뎠거늘 어찌 그들과 같게 하였나이까." 그들의 논리는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일한 만큼 받아야 공평합니다. 그러나 주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한 눈으로 보느냐."
이 비유는 우리 신앙의 가장 깊은 곳을 찌릅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하나님 앞에서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오래 믿었으니", "내가 더 헌신했으니"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애초에 품삯의 논리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죄인을 불러주신 은혜, 그 자체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루를 일했든 한 시간을 일했든, 애초에 부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은혜였던 것입니다.
어느 노 목사님이 은퇴를 앞두고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평생 설교하고, 심방하고, 기도했지만, 하나님 앞에 설 때 내가 내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내밀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피뿐입니다." 수십 년의 사역을 마친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이 고백은, 사실 신앙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 같은 자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도, 신앙의 정점에서도, 우리가 내밀 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유산을 나눠달라고, 내 몫을 찾아달라고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탐심을 채워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탐심 자체를 죽이시고 그 자리에 진짜 소득, 곧 그리스도 자신을 채워주러 오셨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던 마음의 허기는, 오직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로만 채워집니다.
누룩을 버리십시오. 자기 의와 자기 자랑이라는 그 부풀리는 성질을 신앙에서 걷어내십시오. 그리고 회막 뜰에서 연기를 바라보듯,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십시오. 그곳에 우리의 죽음이 있었고, 그곳에 우리의 영원한 소득이 있습니다.
"그것에 누룩을 넣어 굽지 말라 이는 내가 화제로 그들에게 주어 그들의 소득이 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서 아론의 소득이니 대대로 영원한 소득이니라"(레위기 6: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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