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자손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에 여호와께 드릴 예물은 이러하니라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항상 드리는 소제물로 삼아 그 절반은 아침에, 절반은 저녁에 드리되, 그것을 기름으로 반죽하여 철판에 굽고 기름에 적셔 썰어서 소제로 여호와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라. 이 소제는 아론의 자손 중 기름 부음을 받고 그를 이어 제사장 된 자가 드릴 것이요 영원한 규례로 여호와께 온전히 불사를 것이니, 제사장의 모든 소제물은 온전히 불사르고 먹지 말지니라."(레위기 6:19~23)
어느 요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평생 자수성가한 사업가였던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젊을 때부터 "내 손으로 벌지 않은 것은 먹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노년에 병이 들어 거동이 불편해지자, 딸이 매일 찾아와 식사를 떠먹여 주었습니다. 노인은 그 손길을 받을 때마다 불편해했습니다. "내가 뭘 했다고 이걸 받나. 내가 벌어놓은 게 있어야지." 딸이 아무리 "아버지, 이건 제가 그냥 드리고 싶어서 드리는 거예요"라고 말해도, 노인은 끝내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평생 자기 힘으로 쌓아 올린 자존심이, 정작 가장 필요한 순간에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레위기 6장 19절부터 23절, 제사장의 소재 규례를 읽으면서 우리는 이 노인의 모습이 떠오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안에는 이 노인과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거저 받는 것을 불편해하고, 뭔가 내 몫을 보태야 마음이 놓이는 마음 말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마음을 겨냥하여 이 규례를 주셨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매우 냉정하게 진단합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지혜와 힘으로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열심히 하면",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성경은 그 가능성 자체를 부정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근본적으로 무지하고 무능합니다.
그렇다면 사탄은 왜 존재할까요? 사탄의 존재는 하나님의 실수나 방관이 아닙니다. 사탄은 오히려 인간의 무능함과 죄인 됨을 낱낱이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마치 어두운 방에 들어가야 그 방의 어둠을 알 수 있듯이, 사탄의 활동을 통해 인간은 자기 힘으로는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죄의 실상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 끝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얼마나 크신지가 드러납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이 더 밝게 보이는 것처럼, 인간의 무능이 드러날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크게 드러납니다.
레위기의 제사 규례에서 제사장에게 주어진 소재물은 단순한 밀가루가 아닙니다. 그것은 완성된 제사를 상징하며,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성도에게 참된 소득이란 예수의 피로 얻은 죄 사함과 생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 삽니다. 통장 잔고, 승진, 자녀의 성적표, 이런 것들을 소득이라 여기며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원한 소득 앞에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세상이 주는 것들을 더 붙잡으려 합니다.
이것은 이미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두 가지를 명하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는 명령은 은혜로 주어진 소득, 곧 생명을 마음껏 누리라는 초대였습니다. 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명령은 그 은혜의 경계선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미 주어진 풍성한 소득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높이려는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보다 자신이 쟁취할 수 있는 것에 더 끌린 것입니다. 이 죄성은 지금 우리 안에도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레위기 규례를 자세히 보면 흥미로운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 백성은 자신이 원하는 양을 자율적으로 가져와 제사를 드릴 수 있었지만, 제사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은 매일 아침과 저녁, 정해진 십분의 일 에바를 드려야 했습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정량입니다.
이 십분의 일 에바, 곧 한 오멜이라는 분량은 출애굽기 16장의 만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벌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먹이셨습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자격 없는 자들에게, 자격을 따지지 않고 부어주신 하늘 양식이었습니다. 제사장의 소재로 정해진 그 정량은 바로 이 만나를 기억나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자격 없는 자에게 날마다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을 매일 아침저녁으로 되새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놀라운 규례가 나옵니다. 일반 소제물은 제사장이 일부를 먹을 수 있었지만, 제사장 자신이 드리는 소재물은 단 하나도 먹지 못하고 전부 불살라야 했습니다. 나눠 먹을 수 없고, 남길 수 없고, 온전히 태워 없애야 했습니다.
왜일까요?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내세울 수 있는 그 어떤 공로도, 그 어떤 가치도 결국은 아무것도 남지 않고 사라져야 함을 보여줍니다. 처음 예화로 들었던 그 노인의 모습처럼, 우리는 자꾸만 "내가 이만큼은 했다"는 자기 몫을 남겨두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몫이 온전히 재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행하는 모든 일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결국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듯 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은혜만이 우리를 살리는 진정한 환경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이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성도의 참된 환경은 세상의 소득이나 세상의 쾌락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이 이루신 완성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흘리는 땀과 수고는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뿐, 그 자체로는 영원한 가치를 갖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땀과 수고만이 우리를 영원히 살리는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요양원의 그 노인이 딸의 손길을 편안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도 여전히 내 몫을 보태고 싶어 하는 마음과 씨름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 내 손에 쥔 것을 온전히 내려놓고 그저 받는 것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채워지는 만나처럼, 오늘도 내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자격 없는 우리를 향해 변함없이 부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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