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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레위기

레위기 - 오직 피 오직 은혜, 속건제가 말하는 십자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1.

레위기 7장 1~10절

1   속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는 지극히 거룩하니
2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속건제의 번제물을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3   그 기름을 모두 드리되 곧 그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기름과
4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고
5   제사장은 그것을 다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 것이니 이는 속건제니라
6   제사장인 남자는 모두 그것을 먹되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라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니라
7   속죄제와 속건제는 규례가 같으니 그 제물은 속죄하는 제사장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8   사람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는 제사장 곧 그 제사장은 그 드린 번제물의 가죽을 자기가 가질 것이며
9   화덕에 구운 소제물과 냄비에나 철판에서 만든 소제물은 모두 그 드린 제사장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10   소제물은 기름 섞은 것이나 마른 것이나 모두 아론의 모든 자손이 균등하게 분배할 것이니라


어느 교회에 오래 신앙생활을 해온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배에 빠지지 않았고, 헌금도 성실히 했으며, 봉사도 열심이었습니다. 누가 그에게 "
구원이 무엇으로 이루어집니까?" 물으면 그는 주저 없이 대답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받는 거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아요." 정답입니다. 그런데 이 성도의 마음 한구석에는 또 다른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참된 믿음이라면 삶이 바뀌어야 하지 않겠어? 열매 없는 믿음이 무슨 믿음이야.' 이 말도 틀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신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됩니다. 입으로는 "
오직 믿음"을 말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슬며시 '행함'을 그 옆자리에 앉혀 놓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것을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소한 신학적 뉘앙스 차이가 아니라, "다른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훼방하는 율법주의적 탈선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강하게 말씀하셨을까요? 믿음 곁에 행함을 슬쩍 끼워 넣는 순간, 결국 구원의 마지막 저울추는 사람의 손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묘함의 뿌리는 에덴동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뱀은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노골적으로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면서도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는 솔깃한 말을 덧붙였습니다. 사탄은 언제나 인간의 자기중심성, 곧 "내가 무언가를 해서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파고듭니다.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네가 무언가를 보태야지"라는 속삭임도 본질적으로 같은 뿌리에서 나옵니다. 은혜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그 마음, 바로 거기가 사탄이 파고드는 틈입니다.

레위기 7장 1절부터 10절은 얼핏 보면 매우 건조한 규례처럼 보입니다. 속건제의 재물은 지극히 거룩하며, 그 피는 제단 사방에 뿌려야 하고, 기름진 부위는 화제로 불살라야 하며, 남은 고기는 제사장의 몫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짧은 본문 안에 복음의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속건제로 드려진 짐승은 신비로운 동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집에서 기르던 지극히 평범한 양이나 염소였습니다. 어제까지 마당을 뛰놀던 그 짐승이, 오늘 제단 앞에서 "
지극히 거룩한 것"이라 불리게 됩니다. 무엇이 이 짐승을 거룩하게 만들었습니까? 짐승 자신의 특별함이 아닙니다. 그 짐승이 흘린 피, 그리고 그 피가 제단 사방에 뿌려지는 그 '역할'입니다. 존재 자체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피 흘림이라는 사건을 통과했기 때문에 거룩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해하기 쉬운 지점을 짚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이방 종교나 무속에서 신령을 달래기 위해 제물을 바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무속에서의 제사는 인간이 신을 조종하거나 진노를 무마시키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레위기의 제사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구원의 원칙을 인간에게 보여 주시는 자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
이렇게 해야 너희가 산다"고 알려 주시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이 원칙은 레위기 한 장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출애굽기까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붉은 실처럼 이어져 내려옵니다.

첫 번째 장면, 에덴동산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나서 스스로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자신을 가리려 했습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 수치를 가리려 한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옷을 벗기시고, 대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이 지어지려면 반드시 짐승이 죽어야 합니다. 죄 없는 짐승의 피와 희생을 통해 죄인을 덮어 주시는 것, 이것이 성경에 등장하는 첫 번째 구원의 그림입니다.

두 번째 장면, 아벨의 제사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함께 제물을 드렸을 때,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부정한 인간이 희생의 피를 통해 거룩한 이 앞에 설 수 있었던 최초의 예배였습니다.

세 번째 장면, 노아의 방주입니다. 노아는 무결점의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정결한 짐승을 제단에 드린 것이었습니다. 홍수 심판이 노아를 넘어간 것은 그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은혜와 희생의 피 때문이었습니다.

네 번째 장면, 출애굽기 12장의 유월절입니다. 애굽에 마지막 재앙이 임하던 그 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혈통이나 신분을 보고 그 집을 넘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문설주와 인방에 발린 어린양의 피를 보고 넘어가셨습니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이스라엘 사람이든 아니든, 그 집에 피가 발려 있는지가 유일한 기준이었습니다.

가죽옷에서 아벨의 제사로, 노아의 방주에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이 네 장면은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사건이지만 동일한 하나의 원칙을 외치고 있습니다. 구원은 인간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죄 없는 희생의 피를 하나님이 보시고 심판을 넘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기 7장의 속건제 역시 바로 이 줄기 위에 서 있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인간의 행위란 이 그림 어디에도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행위를 자꾸 끼워 넣으려는 시도야말로 십자가 은혜에 가장 크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입니다.

레위기 7장 후반부에는 흥미로운 규례가 나옵니다. 속건제물 중 일부는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갑니다. 제사장은 그 지극히 거룩한 고기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제사장이 그 고기를 먹은 것은 그가 수고했기 때문에, 그가 자격을 갖췄기 때문에 주어진 보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허락,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의 자리와 정확히 겹칩니다. 베드로전서는 우리를 "
왕 같은 제사장"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진짜 선물은 무엇입니까? 세상이 부러워할 만한 물질이나 형통이 아닙니다. 예수의 피로 입게 된 거룩함,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함은 우리의 신앙적 열심이나 수고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아무리 성실히 봉사해도 거룩함을 '제작'할 수는 없습니다. 거룩은 언제나 주어지는 것이지, 벌어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남습니다. "
구원받은 다음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많은 사람이 여기서 은근슬쩍 다시 행위를 끌어들입니다. "구원은 믿음이지만, 구원 이후의 삶은 행함으로 증명해야지." 그러나 성경에는 애초에 '구원 이전'과 '구원 이후'를 나누어 후자에 행위를 추가하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우리 안의 죄성이 사라지거나, 우리가 갑자기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빌립보서 2장 12절, "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자기 힘과 실천으로 구원을 완성해 가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마주하고, 그럼에도 예수의 피로 심판이 이미 넘어간 그 은혜를 매 순간 다시 확인하며 감사하고 감격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을 이루는" 삶입니다. 구원을 이루는 것은 공로를 쌓는 작업이 아니라, 은혜를 매일 새롭게 붙잡는 작업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 행위와 공로를 붙잡고 있을 때, 우리는 끊임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하고 저울질합니다. '나는 이만큼 했는데 왜 저 사람은 인정을 못 받지?' '나는 왜 이 정도밖에 못했지?' 그러나 자기 행위를 내려놓는 순간, 곧 자기부인의 자리에 설 때, 다른 사람과 환경을 향한 원망과 시비도 함께 내려놓아지게 됩니다. 은혜를 붙잡은 사람에게는 억울해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자기 행위를 자랑스레 진열할 그릇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은혜만을 담고, 그것만을 자랑하는 질그릇입니다. 흙으로 빚어진 보잘것없는 그릇이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이 보배이기에 귀하게 쓰임받는 것입니다.

레위기 7장의 속건제 규례는 이천 년 전 갈보리 언덕에서 완결되었습니다. 그날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더 이상 반복될 필요 없는, 단번에 완성된 희생이었습니다. 가죽옷의 피, 아벨의 피, 노아 시대의 정결한 짐승의 피, 유월절 어린양의 피, 그리고 레위기 제단에 뿌려진 속건제물의 피, 이 모든 피는 결국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 피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단 하나입니다. 우리는 심판이 넘어간 자들입니다.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문설주에 발린 그 피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우리가 할 일은 무언가를 더 보태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넘어간 그 은혜 앞에 다시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