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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레위기

레위기 - 찬송하는 직분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7.

"언약궤가 평안을 얻었을 때에 다윗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찬송하는 직분을 맡긴 자들은 아래와 같았더라.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성전을 세울 때까지 그들이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되 그 계열대로 직무를 행하였더라. 직무를 행하는 자와 그의 아들들은 이러하니 그핫의 자손 중에 헤만은 찬송하는 자라 그는 요엘의 아들이요 요엘은 사무엘의 아들이요. 사무엘은 엘가나의 아들이요 엘가나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여로함은 엘리엘의 아들이요 엘리엘은 도아의 아들이요. 도아는 숩의 아들이요 숩은 엘가나의 아들이요 엘가나는 마핫의 아들이요 마핫은 아마새의 아들이요. 아마새는 엘가나의 아들이요 엘가나는 요엘의 아들이요 요엘은 아사랴의 아들이요 아사랴는 스바냐의 아들이요. 스바냐는 다핫의 아들이요 다핫은 앗실의 아들이요 앗실은 에비아삽의 아들이요 에비아삽은 고라의 아들이요. 고라는 이스할의 아들이요 이스할은 그핫의 아들이요 그핫은 레위의 아들이요 레위는 이스라엘의 아들이라."(역대상 6:31~38)

한 젊은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예배 시간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습니다. 찬양을 부를 때마다 '
내가 지금 이 찬양을 부를 자격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난 한 주간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신실했는지를 스스로 채점하고 나서야, 겨우 찬송의 첫 소절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신실했다고 느껴지는 주에는 찬양이 힘찼고, 실패가 많았다고 느껴지는 주에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청년의 모습은 사실 우리 모두의 자화상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찬송조차 내가 잘한 일에 대한 보상처럼, 혹은 내가 자격을 갖추어야만 부를 수 있는 것처럼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역대상 6장 31절부터 38절은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찬송은 내가 자격을 갖추어 드리는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겉보기에 똑같아 보이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두 가지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에게서 나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늘 나를 주어로 삼습니다. '내가 얼마나 기도했는가, 내가 얼마나 헌신했는가, 내가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가.' 이 믿음의 끝에는 언제나 저울이 있습니다. 내 공로를 하나님의 저울에 올려놓고, 그 무게가 구원을 받기에 충분한지를 끊임없이 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아무리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 해도, 사실은 '다른 예수'를 섬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만든 신, 내 공로를 인정해 주는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믿음'은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봅니다. 이 믿음은 나를 주어로 삼지 않고 하나님을 주어로 삼습니다. '하나님이 하셨다, 하나님이 이루셨다, 하나님이 완성하셨다.' 이 믿음 앞에서 나는 내가 기여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됩니다. 마치 오랫동안 애써 쌓아 올린 탑이 사실은 처음부터 다른 이가 세워준 것이었음을 깨닫고 손에 쥐고 있던 벽돌을 조용히 내려놓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목수 이야기입니다. 그는 평생 성당 짓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바쳤습니다. 은퇴하는 날, 사람들이 그에게 "
당신이 이 성당을 지었습니다"라고 칭송하자, 그 노목수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저 설계도대로 나무를 깎았을 뿐입니다. 이 성당을 세우신 분은 건축가이십니다." 그는 자신의 수고를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 수고의 의미와 완성은 온전히 다른 이에게 돌렸습니다.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가운데 분명히 무언가를 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예배하고, 섬깁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의 의미와 구원의 완성은 내가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믿음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우리 시대는 끊임없이 증명을 요구합니다. 학생은 성적으로, 직장인은 실적으로, 부모는 자녀의 성공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고 배웁니다. 이 증명의 논리가 신앙 안에까지 들어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도 '내가 얼마나 쓸모 있는 성도인가'를 증명하려 애쓰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존재 가치는 전혀 다른 곳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한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아이는 아직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걷지도, 말하지도, 부모에게 어떤 유익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 아이를 향해 이미 완전한 사랑과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 가치는 아이의 성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부모가 그를 자녀로 '부른' 그 사실 자체에서 나옵니다.

성도의 존재 가치도 이와 같습니다. 내 능력이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성도로 부르신 그 목적과 취지 안에 내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사명 역시 달라집니다. 사명은 내가 스스로 정하고 열심을 내어 이루어야 할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사명은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구원의 일을 바라보며 감사하고, 그 감사가 찬송으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한 시각장애인 찬양대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악보를 볼 수 없었기에 모든 곡을 귀로 듣고 외워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힘들게 노래를 준비하는지 알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
저는 어두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저를 찾아오셨고, 저는 지금 그 은혜에 응답하여 노래할 뿐입니다. 제가 노래를 잘해서가 아니라, 노래하지 않을 수 없어서 노래합니다." 그의 찬양은 자격 증명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답이었습니다.

역대상 6장의 족보는 매우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족보는 조상에서 시작해 후손으로 내려가지만, 이 본문은 정반대입니다. 찬송을 맡은 자 '해만'이라는 한 개인에서 시작해, 위로 거슬러 올라가 사무엘, 레위,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곧 야곱에까지 이르는 역순의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학적 기법이 아닙니다. 이 역순 족보는 신학적인 선언입니다. 해만이라는 한 사람의 찬송 직분이 그의 개인적인 재능이나 특기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게 원래부터 주어진 본질적인 직무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치 강물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갈 때, 그 강이 결코 한 지점에서 갑자기 솟아난 것이 아니라 훨씬 크고 오래된 산맥 전체에서 흘러나온 것임을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한 시골 마을에 오래된 우물이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우물이 유독 물이 맑고 마르지 않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어느 날 지질학자가 찾아와 그 우물의 수맥을 조사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 우물은 이 마을 아래 흐르는 거대한 지하수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우물 하나만의 힘이 아니라, 땅 전체가 이 우물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해만의 찬송도 이와 같습니다. 그의 찬송은 그 한 사람의 재능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곧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백성에게 흐르는 찬송의 본질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찬송할 때에도, 우리는 결코 개인기를 뽐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본래 주어진 그 직무를 함께 감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두 여인의 찬송이 나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랜 세월 자녀가 없어 눈물로 기도하던 한나는 마침내 아들 사무엘을 얻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수백 년 후,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 마리아는 뜻밖의 잉태 소식을 듣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찬송이 단순히 '내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기쁨의 노래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한나와 마리아의 찬송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중심에는 자신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리심과 구원에 대한 감격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내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만 찬양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일으키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통치 자체를 찬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불편하지만 중요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사실 우리의 동기는 얼마나 자주 '내 기쁨과 내 필요'였을까요? 마치 자판기 앞에 선 사람처럼, 우리는 원하는 것을 넣고 원하는 결과를 기대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런 태도야말로 하나님과 원수 된 삶의 실체입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지, 하나님 그분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에게 매달 용돈을 주다가, 어느 날 아들이 자신을 찾아오는 이유가 오직 용돈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것이 필요해서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이 혹시 이와 같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이런 원수 된 우리를 내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자격 없는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와 구원, 이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참된 찬송이 터져 나옵니다. 그것은 억지로 쥐어짜는 감사가 아니라, 마치 오랫동안 목말랐던 사람이 마침내 생수를 마시고 저절로 터지는 탄성과 같은 것입니다. 한나와 마리아의 찬송은 바로 이 자리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역대상의 배경에는 오랫동안 방황하던 언약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빼앗겼다가,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다윗의 때에 이르러 예루살렘에 안식할 처소를 얻게 된 언약궤, 그 언약궤가 마침내 안식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백성 사이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었다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그림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실체로 완성되었습니다. 언약궤가 안식할 처소를 찾았듯이, 우리의 구원도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더 이상 방황할 필요가 없고, 더 이상 무언가를 보태어 완성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
다 이루었다"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외침은, 우리가 더할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완전한 선언이었습니다.

한 환자가 오랜 투병 끝에 마침내 완치 판정을 받았습니다. 의사가 "
이제 다 나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환자가 해야 할 일은 스스로 무언가를 더 치료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회복된 삶을 감사하며 걸어가는 것뿐이었습니다. 만약 완치된 사람이 계속해서 "나는 아직 부족해, 더 치료받아야 해"라고 불안해한다면, 그것은 의사의 선언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이 완전히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보태려 하고, 내 공로로 그 완성을 유지하려 애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럴 필요가 없는 존재입니다. 성도는 다만 십자가의 은혜만을 바라보며, 그 완성된 구원에 감격하여 찬송하는 존재입니다.

처음 이야기했던 청년이 매주 찬양을 부르기 전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 "
내가 이 찬양을 부를 자격이 있는가"는 사실 잘못된 질문이었습니다. 참된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찬송하는 자로 부르셨는가." 해만의 족보가 이스라엘 전체로 이어지듯이, 찬송의 직분은 특별히 은사가 뛰어난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에게 본질적으로 주어진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내 공로를 저울질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언약궤가 안식을 얻은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구원을 바라보며, 자격 없는 우리를 부르신 그 은혜에 감격하여 노래하면 됩니다. 찬송은 증명이 아니라 응답입니다. 완성이 아니라 완성하신 분을 향한 감격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입술이 열리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이미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평안을 얻은 후에 다윗이 여호와의 성전 낙성식 때부터 노래로 여호와를 섬기는 자를 세워 노래하게 하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섬겼으니" (역대상 6:3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