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수기 20:11)
몇 해 전, 어느 산악인이 히말라야 등반 중 겪은 이야기입니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물이 떨어졌습니다. 함께 오르던 동료들은 지쳐 쓰러지기 직전이었고, 그는 셰르파에게 화를 냈습니다. "왜 물을 더 챙기지 않았냐"고, "이런 위험한 곳으로 왜 우리를 데려왔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가 고백하기를, 그 순간 그가 정말 화가 났던 대상은 셰르파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두려움이었다고 합니다. 목마름은 사람의 밑바닥을 드러냅니다. 배부르고 평안할 때는 좀처럼 보이지 않던 마음이, 갈증 앞에서는 여지없이 튀어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랬습니다. 광야 40년, 그 긴 여정의 거의 끝자락, 가데스라는 곳에서 물이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랬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죽는 게 낫겠다는 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말이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옵니다. 40년이라는 시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신 그 모든 은혜의 세월이 순식간에 잊혀지고, 목마름 하나에 그들의 신앙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때 원망하던 사람들은 사실 40년 전 애굽에서 나온 그 1세대가 아닙니다. 광야에서 태어나고 자란 새로운 세대, 부모의 실패를 보며 자란 자녀 세대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이 조상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술주정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나는 절대 저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자녀가, 정작 어른이 되어서는 똑같은 방식으로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환경을 바꾸고 세대가 바뀌어도, 사람 안에 있는 근본적인 죄성은 저절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원망과 불평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 기도해도 응답이 없어 보일 때, 우리 입에서도 광야 백성들과 똑같은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믿어봤자 소용없다", "차라리 믿지 않는 게 나았다"는 말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출애굽 초기, 르비딤이라는 곳에서도 똑같이 물이 없어 백성들이 다툰 적이 있었습니다(출 17장).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명하셨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치자 물이 솟아났습니다. 그런데 40년이 지난 이번에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치라고 하지 않으시고, 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했습니까? 백성들을 모아 놓고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화를 내며,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쳤습니다.
이것은 마치 의사가 환자에게 "이번에는 약을 새로 처방해 드릴 테니 이대로만 드시면 됩니다"라고 했는데, 환자가 예전에 효과 봤던 다른 약을 임의로 두 배로 먹는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결과가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물은 어쨌든 나왔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이 문제 삼으신 것은 결과가 아니라, 순종하지 않은 모세의 마음과 방식이었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합니다. "겨우 그런 일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다니,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 그러나 이 사건의 본질을 알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 반석은 그냥 돌덩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서 하나님이 "내가 호렙산 반석 위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고 하신 것은, 결국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맞으심을 예표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반석은 단 한 번만 쳐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단 한 번으로 영원히 충분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다시 그 반석을 쳤습니다. 이는 마치 이미 완성된 다리를 두고 "혹시 부족할까 봐" 다시 다리를 놓겠다고 나서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번에 완성된 일입니다. 거기에 사람의 화, 사람의 힘, 사람의 방식을 더하는 것은 그 완전하신 은혜를 가리는 일이 됩니다. 모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 분노와 자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못한 죄였습니다.
민수기는 모세를 가리켜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온유한 자"라고 소개합니다(민 12:3). 그런 모세조차 백성들의 끊임없는 원망 앞에서 결국 무너졌습니다. 시편 106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노하시게 했고, 그 화가 결국 모세에게까지 이르렀다고 말입니다. 온유하기로 소문난 사람도, 반복되는 원망과 압박 속에서는 결국 자기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넘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오랫동안 인내하며 온화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도, 지치고 지친 순간에는 누구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는 저 사람보다 신앙이 좋으니 절대 저렇게는 안 넘어진다"고 자만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기 힘이 아니라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모세의 실패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으로도, 아무리 온유한 인간의 의로도 결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모세가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합니다.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그러자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세우십니다. 여호수아, 히브리어 이름 '예호슈아'는 헬라어로 옮기면 '예수'입니다. 율법의 사람 모세는 백성을 약속의 땅 문턱까지만 인도할 수 있었지만, 결국 그 땅으로 백성을 이끌어 들인 것은 여호수아, 곧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자였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이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마치 유치원 선생님이 아이를 학교 문 앞까지 데려다주는 것처럼,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 앞까지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실제로 그 안으로 이끌어 들이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우리는 여전히 다툽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크고 작은 므리바가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목마름 앞에서 우리도 여전히 서로를 향해 지팡이를 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모든 다툼과 원망에도 불구하고 반석은 이미 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쳐지셨기에, 우리의 다툼이 반복되어도 생명수는 오늘도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미숙하고 넘어지기 쉬운 존재임에도, 하나님은 그 은혜의 샘을 마르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반석을 또다시 우리 힘으로 내리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깨어지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저 마시는 것뿐입니다.
언젠가 다툼의 물이 아니라, 참된 평화로 가득한 그곳에서 영원한 생명수를 마음껏 마실 그날을 소망하며, 오늘도 우리는 그 반석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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