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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민수기

민수기 - 땅이 없는 자의 기업, 제사장의 몫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3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민수기 18:20)

어느 시골 마을에 작은 의원을 운영하던 노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가난한 환자들에게 진료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논 한 뙈기 없었고, 저축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마을 사람 수백 명이 그의 관 앞에서 울었습니다. 그의 재산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가 살려낸 생명들이 그의 기업이었습니다.

민수기 18장은 제사장의 몫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읽을 때 우리는 이상한 역설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몫으로 주시면서도(12절), 동시에 이 땅에는 기업이 없다고 하십니다(20절). 땅도 없고, 분깃도 없다, 그런데 그것이 박탈이 아니라 선물이라고 하십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본문 12절부터 17절에 걸쳐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
처음"입니다. 처음 익은 기름, 처음 익은 포도주, 처음 익은 곡식, 처음 태어난 사람, 처음 태어난 짐승, 이 처음 것들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것이 제사장의 몫이 됩니다. 왜 하필 처음 것입니까? 이 질문의 답은 출애굽에 있습니다. 이집트를 강타한 열 번째 재앙은 처음 태어난 것, 즉 장자를 치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날 밤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은 집에서는 장자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 아래 있던 이스라엘의 장자는 살았습니다.

따라서 처음 태어난 것, 첫 소산,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돌리라는 명령은 단순한 헌납의 규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
이 처음 것은 원래 죽었어야 할 것인데,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살았다"는 고백입니다. 처음 것을 드리는 행위는 대속의 기억을 몸으로 반복하는 예배였습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의 열두 아들 중 르우벤이 장자였지만, 그는 자격을 잃었습니다. 대신 장자의 두 몫은 요셉에게 돌아갑니다. 왜입니까? 요셉이 희생하였기 때문입니다. 형들의 손에 노예로 팔렸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총리가 되어 형들과 아버지를 살렸습니다. 요셉은 말합니다. "
형들이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성경에서 장자권은 혈통의 순서가 아닙니다. 누가 희생하느냐가 장자를 결정합니다.

이 원리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부르십니다(출 4:22). 그런데 장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희생으로 다른 형제들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 장자로 불린 것은 그들이 가장 훌륭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제사장 나라로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출 19:6).

19절에 아름다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
영원한 소금 언약." 소금은 변하지 않습니다. 부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 아론과 그 후손들에게 이 몫을 영원히 주겠다고 소금 언약을 맺으십니다. 역대하 13장에서는 다윗의 왕위도 소금 언약으로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 언약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성전은 파괴됩니다. 제사장 제도는 중단됩니다. 다윗의 왕위를 이을 왕조도 끊어집니다. 소금 언약이 깨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완성되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2~33). 소금 언약의 영원한 왕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신 뒤 유대인들이 표적을 요구할 때,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요 2:19). 예수님은 성전이 되셨습니다.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처음 익은 열매가 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예수님을 "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부릅니다. 처음 것은 죽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처음 것으로 인하여 나머지 전체가 거룩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처음 열매로 하나님께 드리심으로, 그분께 속한 우리 모두가 부활과 거룩함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들로서 몸의 부활을 기다리며 탄식한다고 말입니다(롬 8:23). 우리의 탄식은 절망이 아닙니다. 씨앗이 땅속에서 움트기 전에 껍질이 찢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현재의 신음은 장차 올 영광을 향한 산통입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민 18:20) 제사장은 땅이 없는 사람입니다. 가나안을 분배받을 때 다른 지파들은 각자의 땅을 받습니다. 그러나 레위인과 제사장은 받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땅이 없으면 빈곤한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역설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2차 세계대전 중 네덜란드의 코리 텐 붐과 그 가족은 유대인들을 숨겨주다가 나치에게 발각되어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아버지는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죽었고, 언니 베치는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코리는 살아남아 전 세계를 다니며 오직 한 가지를 외쳤습니다. "
어떤 구덩이도 하나님의 사랑보다 깊지 않습니다." 그녀에게는 집도, 재산도, 가족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녀의 기업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에서 사도의 삶을 묘사할 때 이 역설을 줄줄이 나열합니다. 환난, 궁핍, 매 맞음, 갇힘, 굶주림, 그럼에도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이것이 제사장의 삶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빈털터리이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만유를 소유한 자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9~10절은 천상의 예배 장면에서 새 노래를 소개합니다. "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예수님의 피로 사신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존재입니까? 나라이며 제사장이며 왕입니다. 그러나 이 왕됨은 군림하는 왕이 아닙니다. 자기희생으로 다른 이를 살리는 왕입니다. 제사장의 방식으로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이 땅을 사는 방식은 단 하나입니다. 그 기이한 빛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논리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그 빛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땅의 기업을 붙들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는 삶, 손에 아무것도 없어도 주님이 기업이시라는 고백으로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세상이 결코 설명하지 못하는 증거입니다..

노의사가 돈을 마다하고 환자를 살린 것은 스스로를 소진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보다 더 큰 무언가를 기업으로 붙들었기에, 쥐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기업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만유가 되시는 그분이 우리의 분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아무것도 없는 자처럼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가진 자로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합니다. 이것이 제사장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