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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민수기

민수기 - 메뚜기의 눈과 믿음의 눈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바란 광야에서 그들을 보냈으니 그들은 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령 된 사람이라."(민수기 13:1~33)

바란 광야의 뜨거운 모래바람이 잦아들던 어느 날, 이스라엘 진영에 특별한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열두 명의 사내들이 떠났습니다. 각 지파에서 한 명씩, 그것도 지휘관급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십 일 후, 그들이 돌아왔을 때 이스라엘 진영 전체가 그 보고를 숨죽여 기다렸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먼저 증거물이 들려 있었습니다. 포도 한 송이가 어찌나 크고 탐스러운지, 두 사람이 막대기에 매달아 어깨에 걸고 와야 했습니다. 무화과와 석류도 함께였습니다. 광야에서 일 년 넘게 만나만 먹어온 사람들에게 그 과일들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땅은 실로 '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맞았습니다. 그런데 보고는 거기서 끊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그러나' 한 마디가 이스라엘의 운명을 사십 년 광야로 돌려놓았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민수기 본문만 읽으면 열두 정탐꾼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1장을 펼쳐 보면 그림이 달라집니다. 백성들이 먼저 요청했습니다. "
우리가 먼저 정탐꾼을 보내어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알아봅시다." 모세도 그 말이 일리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편한 질문과 마주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고 해서 다 좋은 것입니까? 시편 106편은 광야의 이스라엘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고기를 달라는 요구에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퍼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고기가 이 사이에 있을 동안 재앙이 임했습니다. 사무엘 시대에 왕을 달라는 요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을 주면 네가 고생한다"고 경고하셨지만 백성들은 끝까지 왕을 요구했고, 허락받은 왕으로 인해 이스라엘 역사가 얼마나 피로 물들었는지 우리는 압니다. 허락은 때로 심판의 언어입니다.

백성들이 정탐을 원했던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불확실한 내일을 내 손으로 통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몇 해 전, 한 장로님이 오랫동안 준비해 온 사업을 앞두고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두꺼운 서류 파일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했습니다. "
목사님, 저는 이 사업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분석을 다 했습니다. 리스크도 다 계산했어요. 이제 하나님의 허락만 받으면 됩니다." 그 눈빛에는 확신이 아니라 불안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러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계획을 하나님께 승인받으러 온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정탐꾼을 요구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야고보서 4장은 이런 인간을 날카롭게 포착합니다. "
오늘이나 내일이나 어떤 도시에 가서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스라엘은 안개이면서 홍수처럼 살려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코로나 한 번으로 몇 년치 계획이 한꺼번에 소멸되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안개임을 몸으로 배웠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내일을 오늘로 당겨 끌어안고 염려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간결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정탐이 필요없습니다. 먼저 구할 것을 구하면 됩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보고를 이어갔습니다. 땅은 좋은데 사람들이 문제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이었습니다. 네피림, 창세기 6장에 등장하는 이 이름은 히브리어로 '장대한 자들', '용사들'을 뜻합니다. 경건한 셋의 후손들이 세상에서 번성한 가인의 후손들, 즉 문명과 권력을 구가하는 자들의 딸들을 아름답다 여겨 결혼하면서 탄생한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기준에서 성공한 영웅들이었습니다. 높은 성벽을 쌓고, 제국을 건설하며,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니므롯이 그 전형입니다. 함의 후손인 니므롯은 "
세상의 첫 용사"로서 바벨론과 앗수르 제국의 터를 닦은 자입니다. 골리앗을 상상해 보십시오. 키 약 3미터 20센티, 갑옷 무게만 60킬로그램, 창날 무게 7킬로그램입니다. 그런 자들이 가나안 성읍 곳곳에 버티고 있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이 보기에, 그것은 현실이었습니다.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불편한 거울을 마주합니다. "
이런 본문을 '하면 된다'는 말로 설교하여 무리한 건축을 강행하다가 부도가 난 교회들이 한둘이 아니다." 믿음의 이름으로 포장된 야망, 그것도 네피림의 속성입니다. 세상의 명성을 향해 달려가되 하나님의 이름을 방패로 삼는 것, 성경 구절을 내 욕망의 보증수표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네피림의 후예들이 오늘 교회 안에서 하는 짓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이용해 내 꿈을 이루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열두 명 중 두 사람만이 달랐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그런데 갈렙의 이름 앞에는 흥미로운 수식어가 붙습니다. 그는 "
그니스 사람"이었습니다(민 32:12). 이방인이었습니다. 혈통으로는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유다지파에 속하게 된 것은 혈연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안에 편입되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룻이 그랬듯, 라합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혈통 이스라엘 열 명은 불신앙으로 메뚜기가 되었고, 이방인 출신 갈렙 한 명은 믿음으로 산을 보았습니다. 갈렙은 무엇을 믿었습니까? 긍정적 사고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근거 없는 낙관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았습니다. 출애굽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보았습니다. 홍해가 어떻게 갈라졌는지 보았습니다.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 그 언약에 얼마나 신실하신지를 알았습니다. 그 앎이 믿음이었습니다.

발람이 발락 앞에서 고백한 말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발람은 돈을 받고 저주하러 왔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서 축복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원하지 않았으나 진실을 말했습니다. 갈렙이 믿은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백세 노인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은 현실의 눈으로 보면 불가능을 넘어 불합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의로 여겨졌습니다.

갈렙이 물려받은 것이 이 믿음입니다. 아낙 자손의 장대함은 사실이었습니다. 성벽의 견고함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렙의 눈에는 그 너머에 있는 더 큰 사실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믿음의 선상에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바라보고 기다린 그 실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이 우리 죄의 대속이며, 예수의 부활이 우리의 '의'임을 믿는 것은 긍정적 사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이루신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말했습니다. "
우리가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는데, 그들에게도 우리가 메뚜기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이 말이 슬픈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를 아낙 자손의 시선으로 먼저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기 전에, 세상의 거인들의 눈으로 자신을 먼저 보았습니다. 자기 비하가 아닙니다. 믿음의 부재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보고 있습니까?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교회는 보잘것없고, 그리스도인은 어리석어 보이고, 십자가는 약함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이미 심판 아래 있고, 만유의 주 되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입니다.

메뚜기의 눈으로 볼 것인가, 믿음의 눈으로 볼 것인가, 그 선택이 어떤 땅에서 죽을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광야에서 죽을 것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인가?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