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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민수기

민수기 - 온유한 자와 나병 든 자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29.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수기 12:3)

광야는 숨길 곳이 없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모든 것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사람의 속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대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세롯 광야에 진을 치고 있던 어느 날, 조용하고 갑작스러운 사건 하나가 터집니다. 모세의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이었습니다. 구스는 지금의 에티오피아 지역으로, 그 여인은 이방인이었고 피부색도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절대적인 지도자가 어찌하여 우리 중의 최고 가문 여인도 아니고, 이방의 흑인 여성을 아내로 취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방의 진짜 속내는 달랐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미리암은 자신도 선지자였습니다. 홍해를 건넌 날, 소고를 잡고 여인들을 이끌며 승리의 찬양을 선창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습니다.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 우림과 둠밈으로 재판하는 자였습니다. 그들의 비방은 결국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있다. 왜 모세만이냐."

그런데 정작 비방을 받은 모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 침묵을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온유함이란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어를 들여다보면 의미가 훨씬 깊고 무겁습니다. '아나브'는 억눌린, 낮아진, 가난한, 비참함이란 뜻입니다. 모세의 침묵은 느긋한 성격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고 비천한 존재인지를 뼛속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의 침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떻게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까? 출애굽기 4장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는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거듭 거절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두 가지 표징을 보이십니다. 첫 번째는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가 결정적입니다. "네 손을 품에 넣으라." 모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빼자 손이 나병에 걸려 눈처럼 하얗게 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넣었다가 빼니 본래 살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이 표징이 더 강력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두 번째 표징은 바로 앞에서 행해지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이 표징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손을 품에 넣었다 빼는 순간, 모세는 보았습니다.
"나의 속이 이것이구나."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손이었지만, 품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자 나병 투성이였습니다. 모세는 그 순간부터 자신의 내면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그를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여기서 레위기의 나병 규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레위기 13장은 나병 진찰의 기준을 세밀하게 기술합니다. 흥미로운 역설이 있습니다. 나병이 전신에 퍼져서 온몸이 다 하얗게 되면, 오히려 정하다고 선언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생살이 하나라도 보이면 부정하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전신이 나병으로 덮인 사람은 자신이 완전한 나병 환자임을 압니다. 감출 것도 없고 부인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생살이 보이는 사람은 아직 건강한 부분이 있다고 착각합니다. 자신이 나병 환자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율법의 심층을 가르치셨을 때, 그 말씀의 날 앞에서 자신의 죄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마나 깊은지를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산상수훈이 끝난 직후 처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이 누구입니까? 나병 환자였습니다(마태복음 8장). 그는 온몸이 나병으로 뒤덮인 사람이었습니다. 숨길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온전한 항복이었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을 들으신 여호와께서 갑자기 세 사람을 회막으로 부르십니다. 구름 기둥 가운데서 강림하신 하나님은 아론과 미리암에게 물으십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알리고 꿈으로 말하겠지만,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다.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하며, 나는 그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한다.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를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서 떠나시자 미리암에게 나병이 나타납니다. 온몸이 눈처럼 하얗게 됩니다. 그제야 아론이 모세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내 주여, 우리가 어리석은 일을 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그가 살이 반이나 썩어 모태로부터 죽어서 나온 자같이 되지 않게 하소서." 아론이 고백한 그 말은 살이 반이나 썩어 죽어서 나온 자가 바로 자신들의 실상이었다는 것입니다. 나병이 겉으로 드러나고 나서야 비로소 보인 것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먼저 보았습니다. 그래서 침묵했습니다. 침묵은 굴복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죄인으로서의 겸허함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훗날 예수님께서 겪으신 일과 놀랍도록 겹칩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십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비방합니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했다고 비방받은 것처럼, 예수님은 이방인과 같은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방받으십니다. 미리암의 비방과 바리새인의 비방은 구조가 같습니다. 저 사람은 우리와 어울려야 하는데, 왜 저런 자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까? 그 비방의 뿌리는 동일합니다. 자신이 나병인 줄 모르는 사람의 오만입니다.

예수님은 그 비방에 응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모세의 온유함이 자신이 나병임을 아는 데서 왔다면, 예수님의 온유함은 우리 모두의 속을 꿰뚫어 보시는 창조주의 긍휼에서 옵니다. 모세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서 온유했고,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임을 아시기에 온유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죄 많은 여인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 잔칫상 아래로 들어와 예수님의 발 곁에 앉습니다. 그녀는 눈물로 그 발을 씻기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향유를 붓고, 그 발에 입을 맞추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시몬은 속으로 비방합니다. '
저 사람이 선지자라면 저 여자가 누구인지 알 텐데.' 예수님은 그 속을 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빚진 것이 많아 탕감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느니라." 이 여인은 살이 반이나 썩어 죽어 나온 자와 같은 자신을 알았기에 그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시몬은 자신이 그런 자임을 몰랐기에 비방했습니다.

미리암도, 아론도, 시몬도, 그리고 오늘의 우리도, 비방은 결국 자신이 나병인 줄 모를 때 나옵니다. 정치를 비방하고, 종교를 비방하고, 이웃을 비방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목사가 성도를 비방하고, 성도가 목사를 비방하고, 성도끼리 비방합니다. 코로나19가 터지자 많은 이들이 반색했습니다. 드디어 교회에 나가지 않을 명분이 생겼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서로 부딪히지 않으면 자신이 나병인 줄 모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정확히 그 부딪힘 속에서 자신의 속이 어떠한지를 발견하는 곳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찰은 불편하지만, 그 마찰이 없으면 우리는 끝까지 자신이 깨끗하다고 착각한 채 살아갑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 비방을 받은 사람이 비방한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것이 온유함의 열매입니다. 나병이 든 줄 아는 사람은 나병 든 형제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같은 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응답하십니다. 이레 동안 진영 밖에 격리되었다가 미리암은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후로 성경에 그녀의 말은 단 한 마디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오직 죽어서 묻혔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민수기 20:1). 입을 닫을 수밖에 없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비극이 아니라, 진정한 온유함의 시작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3장에서 모세는 여호와께 간구합니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얼굴을 직접 보면 살 수 없습니다. 대신 모세를 반석 틈에 숨겨두고, 당신의 영광이 지나간 후 그 뒷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그 반석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고린도전서 10:4). 반석이신 그리스도 안에 숨겨진 자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석 안에서, 여호와께서 선포하십니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은혜는 자격 있는 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긍휼은 깨끗한 자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살이 반이나 썩어 죽어서 태어난 자임을 아는 사람, 품에서 꺼낸 손이 나병투성이임을 본 사람, 그에게 은혜가 임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그 나병 든 인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단번에, 영원히 말입니다. 온유하신 그분의 품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