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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민수기

민수기 - 탐욕이 죽음을 부르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15.

"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 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백성이 일어나 그 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백성이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행진하여 하세롯에 이르러 거기 거하니라."(민수기 11:31~35)

광야에는 무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걸어온 그 길을 오늘 우리가 지도 위에서 더듬어 보면, 그 여정의 이름들이 하나같이 심상치 않습니다. 다베라, "
불사름의 땅." 기브롯 핫다아와, "탐욕의 무덤." 이름만 들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광야는 무덤을 파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묻힌 것이 시체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탐욕도 함께 묻혔습니다.

출애굽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갔습니다. 매일 아침, 이슬이 걷히면 땅 위에 흰 서리 같은 것이 깔렸습니다. 만나였습니다. 그것을 거두어 갈고 삶으면 꿀 섞은 과자 같은 맛이 났습니다.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기적에도 질립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 것이냐?" 그들은 울었습니다. 아이처럼, 투정하듯이, 그리고 말했습니다. "애굽에서는 생선도 먹고, 오이도 먹고, 참외도 먹었는데."

그 기억이 얼마나 달콤했던지, 노예살이의 굴욕은 지워지고 식탁의 풍경만 남아 있었습니다. 사람의 기억은 그렇게 자기에게 유리하게 편집됩니다. 채찍 맞던 기억은 흐릿해지고, 마늘 냄새만 선명하게 남습니다. 하나님은 그 원망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고기를 주셨습니다. 바다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더니, 메추라기 떼가 진영 사방으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땅 위 두 규빗 높이, 사람 가슴팍까지 차오르는 높이로 말입니다.

그 순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달라졌습니다. 울음을 그쳤습니다. 대신 손이 바빠졌습니다. 그들은 일어나 메추라기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종일, 밤새도록, 다음 날 낮까지,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가장 적게 모은 사람도 열 호멜, 요즘 단위로 환산하면 220리터가 넘는 양이었습니다. 그것도 최솟값이었습니다. 그들은 고기를 오래 보관하려고 진영 사면에 펼쳐 두었습니다.

그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사방이 메추라기를 펼쳐 말리는 진영, 눈이 닿는 데까지 고기입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쉬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들의 손, 고기가 충분히 있는데도 멈추지 않습니다. 더 모아야 합니다. 더 많이 쌓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셨으니 지금 잡지 않으면 내일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오겠느냐는 생각입니다.

아침저녁 예배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지금 눈앞에 고기가 날아다니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탐욕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찾아옵니다. 나쁜 것을 욕심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좋은 것을 더 가지고 싶은 마음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탐욕의 얼굴입니다.

그리고 재앙이 임했습니다.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씹히기도 전에, 여호와의 진노가 임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거기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 이름이 기브롯 핫다아와가 되었습니다. "
탐욕의 무덤." 여기서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고기 먹고 싶다는 것이 죽을 죄입니까? 그것만 보면 지나쳐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벌하신 것은 고기를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탐욕 자체였습니다. 고기를 주셨는데도 멈추지 않는 것, 쌓아두고도 더 쌓으려는 것, 밤을 새워가며 긁어모으는 것, 그 와중에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만나를 처음 주셨을 때도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더 많이 거두어 남겨 두면 다음 날 썩어서 벌레가 생겼습니다. 안식일에도 나가서 거두려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40년의 광야 훈련은 결국 이것을 가르치는 과정이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양식으로 오늘을 사는 것,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탐욕에 불타오르는 동안,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 칠십 명을 모아 오라. 내가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겠다." 그 말씀대로 칠십 명이 모이자, 하나님의 영이 그들 위에 임했고, 그들은 예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임에 오지 않은 두 사람, 엘닷과 메닷이 진영 안에서 예언을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달려와 보고했습니다.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 자기 스승의 권위를 지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모세는 광야 한가운데서, 수백만 명의 원망과 탐욕 앞에서 지쳐 하나님께 차라리 죽여달라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 영이 임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내 자리를 빼앗길까 봐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받기를 소원한다고 말합니다. 탐욕과 정반대의 자리입니다. 쌓아두려는 마음이 아니라 나누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한 자의 모습입니다.

모세가 소원했던 그 날이 왔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겠다고, 자녀들이 예언하고, 늙은이가 꿈을 꾸고, 젊은이가 이상을 볼 것이라고, 남종과 여종에게도 부어주겠다고, 지위도 성별도 나이도 구분이 없습니다. 모두에게 부어주겠다고 예언했습니다. 그 약속이 오순절에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은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다고,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입니까? 인간의 본능은 쌓는 것입니다. 더 갖는 것입니다. 남보다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본능이 뒤집혔습니다. 팔아서 나눠 주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도덕적 결단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이 임한 결과였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안에도 탐욕이 있습니다. 메추라기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면 잠 못 자고 잡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메추라기가 아니라 현금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만 원짜리 지폐가 하늘에서 떨어진다면, 새벽 기도도 잊고, 주일 예배도 잊고, 온 가족을 동원해 주워 담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탐욕이 다 인간의 속에서 나온다고,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손을 씻었느냐 씻지 않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 안에 무엇이 있느냐의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여전히 정욕과 탐심이 요동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거짓말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이 성도의 현실입니다. 이미 못 박혔으나 아직 이 땅에서는 계속 일어납니다. 그래서 갈등이 있습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서로 대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입니다. 탐욕을 극복한 사람이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탐욕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아는 사람이 복음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이겨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처리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성령의 빛 아래에서는 탐욕의 무덤 아닌 것이 없습니다. 자랑스럽게 쌓아 두었던 것들, 잠 못 자며 긁어모았던 것들, 아름답게 포장했던 것들이 사실은 기브롯 핫다아와였습니다. 탐욕의 무덤이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도덕을 자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시,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성도의 나그네 길은 탐욕의 무덤이라는 흔적을 남기며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무덤마다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내 정욕과 탐심이 거기 묻혔다는 표시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너머에 부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내 안에서 탐심이 고개를 들더라도, 믿음의 창시자이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갑니다. 이 땅에서의 남은 때를, 쌓아 두려는 손이 아니라 나누어 주는 손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