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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빌립보서

빌립보서(26) - 무엇에든지 그리스도를 생각하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21.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립보서 4:8~9)

어느 날 한 철학과 교수가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
여러분, 정의란 무엇입니까?" 학생들은 저마다 손을 들었습니다. 누군가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 했고, 누군가는 "각자에게 합당한 몫을 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딘가 허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강의가 끝난 뒤 한 학생이 교수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교수님, 그럼 교수님은 정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교수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 그것을 가르쳐왔는데, 아직도 모르겠네."

이것이 인간의 지혜가 닿을 수 있는 한계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정의에 목말라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책은 정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주지 못합니다.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만 더 정교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달리는 기차 앞에 인부 다섯 명이 있다면, 방향을 틀어 한 명을 희생시켜야 합니까? 다리 위의 덩치 큰 사람을 밀어서 기차를 멈출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까? 질문은 정밀해지지만 답은 점점 더 흐릿해집니다.

빌립보서 4장 8절에는 아름다운 목록이 하나 등장합니다.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순결한 것, 사랑스러운 것, 명예로운 것,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 이 목록을 읽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
맞아, 우리 모두 이런 것들을 추구해야 하지." 그런데 잠깐, 이 목록은 사실 기독교인만의 것이 아닙니다. 고대 헬라 철학자들도 이와 비슷한 덕목들을 가르쳤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런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세상의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성도도 함께 추구하라"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복음의 날카로움이 드러납니다.

텔레비전의 한 토론 프로그램에서 독일인, 일본인, 중국인, 미국인이 한 자리에 앉아 한반도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모두 지성인들이었습니다. 기자, 교수,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마다 말하는 "
옳은 것"이 달랐습니다. 독일의 옳은 것과 일본의 옳은 것이 달랐고, 중국의 정의와 미국의 정의가 달랐습니다. 심지어 남한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북한은 그르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옳은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명예로운 것"의 기준은 누가 정합니까?

이것이 인류의 오랜 딜레마입니다. 선함을 이야기하지만 누구의 선함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지 불분명합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나라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들의 기준으로 의를 주장한 결과, 인류는 가장 의로운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로마의 정의로, 유대의 율법으로, 군중의 여론으로 말입니다. 복음은 바로 그 인간의 기준들을 무너뜨립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이것을 배웠습니다. 아테네는 당대 최고의 철학 도시였습니다. 자유 시민들은 노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오직 하나, 새로운 사상을 논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헬라 철학을 알고 있었습니다. 헬라 시인의 말도 인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로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철학자들은 "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가"라며 비웃었습니다. 열매가 없었습니다.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로 가는 길, 바울의 마음속에 한 가지 결심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는 훗날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는 오직 십자가만 전하기로 했습니다.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서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에서는 열매가 맺혔습니다. 복음이 이 세상의 진선미와 공유될 수 있는 내용이라면, 바울은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환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을 "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소요하게 하는 전염병 같은 자"라고 로마 총독 앞에서 고발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세상의 모든 기존 이론과 가치 체계를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생각이 옳다는 주장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기준의 정의, 내 기준의 아름다움, 내 기준의 명예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빌립보서 4장 8절의 목록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바울이 고린도후서 6장에서 자신의 사역을 회고하는 장면을 보면 답이 보입니다. 그는 환난과 궁핍과 고난, 매 맞음과 갇힘과 수고로움 가운데서도 "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역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8절의 목록입니다. 참된 것, 경건한 것, 순결한 것, 사랑스러운 것, 그런데 이것은 세상의 철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반응은 둘로 갈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바울은 욕됨, 악한 이름, 속이는 자, 무명한 자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광, 아름다운 이름, 참됨, 살아있음으로 보였습니다. 같은 삶인데 보는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보인 것입니다. 세상의 덕목으로 살았다면 모두가 박수를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덕으로 살았기에 박수와 돌팔매가 함께 날아왔던 것입니다.

9절은 결론입니다. "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바울은 자신에게서 배우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사도란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바울에게서 배운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서 배운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리스도를 받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의 삶을 본 바대로 행하십시오. 그러면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
아, 내가 열심히 행해야 하나님의 평강을 받는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모든 명령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자기 뜻을 친히 이루십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이 이것을 보증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시작하신 분이 이루십니다. 우리가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노인이 매일 새벽 교회에 나와 기도를 했습니다. 젊은 목사가 어느 날 물었습니다. "
어르신, 기도할 때 무슨 말씀을 드립니까?" 노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답했습니다. "별 말씀은 안 드립니다. 그냥 예수님 얼굴을 바라보고 앉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저를 바라보시고 앉아 계십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엇에든지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는 말의 핵심입니다. 거창한 결심이나 대단한 실천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기쁘든지 슬프든지, 그 순간에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것인가? 이것이 경건한 것인가?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인가? 그렇게 바라볼 때, 십자가로 다 이루신 그분의 삶이 우리 안에서 흘러넘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애써 그리스도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이미 에베소서 2장 6절은 성도의 현주소를 이렇게 선언합니다. "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진 존재입니다. 이 역사 속에 살고 있지만, 그 정체성은 이미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무엇에든지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며 살아갈 때, 이미 묵시로 완료된 그 일들이 말씀과 성령으로 확인됩니다. 그것이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세상이 줄 수도 없는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기차가 달려오는 상황에서도, 나라마다 정의가 다른 혼란 속에서도, 안팎으로 흔들리는 교회 안에서도, 성도에게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 있습니다. 그것은 철학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덕목을 실천해서 얻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무엇에든지,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