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빌립보서 4:14~20)
어느 해 겨울,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 오지 마을에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보낸 이는 고국의 작은 교회 청년부였습니다. 봉투 안에는 얇은 편지 한 장과 함께 구겨진 지폐 몇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편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저희도 넉넉하지 않아서 많이 못 드려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달에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 중 조금을 보냅니다. 선교사님이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선교사는 그 봉투를 오래 내려다보았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그 돈의 액수가 아니라, 그 돈이 담고 있는 무언가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후원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4장에서 말하려 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편지입니다. 사슬에 묶인 죄수가 쓴 글치고는 놀랍도록 밝고 따뜻합니다. 그 이유는 빌립보 교회가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을 직접 파견해, 바울에게 연보를 전달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군대에 간 아들에게 어머니가 손수 짠 내복과 된장을 보내듯,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잊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그러면서도 곧바로 덧붙입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이 두 문장 사이에 복음의 핵심이 숨어 있습니다. 바울은 고맙다고 말하면서도, 그 고마움이 돈 때문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
인류의 모든 종교는 하나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간이 신에게 바친다 → 신이 인간에게 보답한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는 신전이 즐비했습니다. 아테나, 아폴론, 제우스… 각각의 신에게 정성을 드려야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이름 모를 신이 있어서 자신이 실수로 그 신을 빠뜨릴까 봐, 아테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이름의 제단까지 만들어 두었습니다. 빠짐없이 바쳐야 빠짐없이 받을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바울이 그 아테네 광장 한복판에 서서 말합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5) 이 선언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당신들이 신에게 바치는 것이 없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 방향 자체가 반대라는 말입니다. 신이 인간에게 먼저 주셨습니다. 생명도, 호흡도, 만물도, 모두 하나님이 먼저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것은 사실 처음부터 우리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서 11장은 이것을 더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그 누구도 하나님께 먼저 드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고, 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주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죽기 전에 성전 건축을 위해 국가 예산을 총동원하고, 개인 재산까지 쏟아부었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것을 바치고서 그가 한 기도가 역대상 2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 자랑이 없습니다. 공로 의식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 자체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수천 년 전 다윗과 로마 감옥의 바울이 같은 언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 안에 같은 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은 마게도냐 교회들, 즉 빌립보를 포함한 그 지역 교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당시 그들의 형편은 어떠했습니까?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극심한 가난이…"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극심한 가난이 오히려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했습니다. 그들은 힘에 지나도록 자원했고, 이 은혜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오히려 간절히 구했습니다.
경제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통장 잔고가 0인 사람이 기부를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특별히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은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내 안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나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내 통장에서 나온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곳에서 왔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은 이 모든 것의 원천을 가리킵니다.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 자신이 먼저 연보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비워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역사상 가장 큰 연보입니다. 빈 통장이 아니라, 생명 자체를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회의 연보는 진공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연보를 먼저 받은 사람들이, 그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려보낸 것입니다. 강물이 상류에서 내려오면 하류가 채워지듯,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내린 은혜가 바울에게로, 다시 빌립보 교회를 통해 바울에게로 흘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연보를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에서 향기로운 제물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가리킵니다. 에베소서 5장 2절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즉, 진짜 향기로운 제물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빌립보 교회의 연보가 향기로운 제물이 된 것은, 그것이 인간의 종교적 열심으로 드려진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연보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향기롭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향기로워집니다.
아프리카 선교사가 받은 그 선교헌금이 향기로울 수 있었던 것은 액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돈을 보낸 청년들이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이 그들을 통해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은 공로를 세운 것이 아니라, 은혜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구절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것을 읽고 '연보를 많이 하면 하나님이 물질로 채워주신다'고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거래의 종교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풍성함은 로마 감옥 안에서도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풍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 풍성함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것이 진짜 풍성함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채우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채우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쓸 것의 전부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길은 하나입니다. 내 것을 바쳐 하나님께 무언가를 받아내려는 거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받은 자로서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공로를 세운 것이 아니라, 은혜의 강물 속에 잠시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강물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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