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 말씀 묵상/빌립보서

빌립보서(28) - 향기로운 제물, 주님의 것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삶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10.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빌립보서 4:14~20)

어느 해 겨울,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 오지 마을에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보낸 이는 고국의 작은 교회 청년부였습니다. 봉투 안에는 얇은 편지 한 장과 함께 구겨진 지폐 몇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편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
저희도 넉넉하지 않아서 많이 못 드려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달에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 중 조금을 보냅니다. 선교사님이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선교사는 그 봉투를 오래 내려다보았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그 돈의 액수가 아니라, 그 돈이 담고 있는 무언가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후원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4장에서 말하려 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편지입니다. 사슬에 묶인 죄수가 쓴 글치고는 놀랍도록 밝고 따뜻합니다. 그 이유는 빌립보 교회가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을 직접 파견해, 바울에게 연보를 전달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군대에 간 아들에게 어머니가 손수 짠 내복과 된장을 보내듯,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잊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그러면서도 곧바로 덧붙입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이 두 문장 사이에 복음의 핵심이 숨어 있습니다. 바울은 고맙다고 말하면서도, 그 고마움이 돈 때문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

인류의 모든 종교는 하나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인간이 신에게 바친다 → 신이 인간에게 보답한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는 신전이 즐비했습니다. 아테나, 아폴론, 제우스… 각각의 신에게 정성을 드려야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이름 모를 신이 있어서 자신이 실수로 그 신을 빠뜨릴까 봐, 아테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이름의 제단까지 만들어 두었습니다. 빠짐없이 바쳐야 빠짐없이 받을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바울이 그 아테네 광장 한복판에 서서 말합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5) 이 선언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당신들이 신에게 바치는 것이 없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 방향 자체가 반대라는 말입니다. 신이 인간에게 먼저 주셨습니다. 생명도, 호흡도, 만물도, 모두 하나님이 먼저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것은 사실 처음부터 우리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서 11장은 이것을 더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그 누구도 하나님께 먼저 드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고, 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주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죽기 전에 성전 건축을 위해 국가 예산을 총동원하고, 개인 재산까지 쏟아부었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것을 바치고서 그가 한 기도가 역대상 2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 자랑이 없습니다. 공로 의식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 자체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수천 년 전 다윗과 로마 감옥의 바울이 같은 언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 안에 같은 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은 마게도냐 교회들, 즉 빌립보를 포함한 그 지역 교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당시 그들의 형편은 어떠했습니까? "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극심한 가난이…"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극심한 가난이 오히려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했습니다. 그들은 힘에 지나도록 자원했고, 이 은혜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오히려 간절히 구했습니다.

경제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통장 잔고가 0인 사람이 기부를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바울은 그것을 "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특별히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은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내 안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나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내 통장에서 나온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곳에서 왔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은 이 모든 것의 원천을 가리킵니다. "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 자신이 먼저 연보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비워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역사상 가장 큰 연보입니다. 빈 통장이 아니라, 생명 자체를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회의 연보는 진공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연보를 먼저 받은 사람들이, 그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려보낸 것입니다. 강물이 상류에서 내려오면 하류가 채워지듯,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내린 은혜가 바울에게로, 다시 빌립보 교회를 통해 바울에게로 흘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연보를 "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에서 향기로운 제물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가리킵니다. 에베소서 5장 2절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즉, 진짜 향기로운 제물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빌립보 교회의 연보가 향기로운 제물이 된 것은, 그것이 인간의 종교적 열심으로 드려진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연보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향기롭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향기로워집니다.

아프리카 선교사가 받은 그 선교헌금이 향기로울 수 있었던 것은 액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돈을 보낸 청년들이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이 그들을 통해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은 공로를 세운 것이 아니라, 은혜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구절입니다. "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것을 읽고 '연보를 많이 하면 하나님이 물질로 채워주신다'고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거래의 종교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풍성함은 로마 감옥 안에서도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풍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 풍성함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것이 진짜 풍성함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채우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채우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쓸 것의 전부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길은 하나입니다. 내 것을 바쳐 하나님께 무언가를 받아내려는 거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받은 자로서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공로를 세운 것이 아니라, 은혜의 강물 속에 잠시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강물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