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빌립보서 4:23)
어느 겨울, 한 노인이 처음으로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오랜 세월 신앙과 멀리 살다가 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고 난 뒤, 무언가에 이끌리듯 예배당 문을 밀고 들어선 것입니다. 그는 맨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자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나갔습니다. 그 뒤로 그는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누구나 아쉬워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우리 모두 그 교인들 중 하나였을 수 있습니다. 낯선 얼굴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아는 사람과의 인사는 자연스럽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에는 이상한 어색함이 따라붙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마무리하며 건넨 말이 바로 그 어색함을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빌 4:21). 각각, 즉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문안하라는 것입니다. 선별하지 말고, 친한 사람만 가려내지 말고, 모든 성도에게 인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편지가 쓰인 장소를 생각하면 더욱 놀랍습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의 감옥 안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을 뻔하다가 로마 시민권을 내세워 가이사에게 상소함으로써 로마까지 이송된 것입니다. 그 날 밤 주님이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 23:11).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는 길이었지만, 그것이 바로 복음이 로마 심장부로 들어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감옥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황제를 지키는 시위대 병사들에게, 감옥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그 결과가 빌립보서 4장 22절에 담겨 있습니다.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가이사의 집 사람들, 즉 로마 황제의 살림을 돌보던 이들 중에 예수를 믿는 자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로마 황제는 이미 신격화된 존재였습니다. 가이사가 주(主)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이사를 섬기는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발각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죄수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한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복음은 뚫리지 않을 것 같은 곳에서 가장 극적으로 뚫린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제 복음의 길이 막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막힌 자리에서 가이사의 집 안에까지 복음의 문을 여셨습니다.
이 장면은 또 다른 고백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시던 날, 빌라도는 예수를 풀어주려 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이 소리쳤습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 19:15). 여호와 하나님을 주로 믿고 메시아를 수백 년간 기다려 온 그들이, 정작 메시아가 오셨을 때 로마 황제를 왕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원하던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로마를 몰아내고, 경제적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줄 왕을 기다렸는데,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들의 기대에 맞지 않는 메시아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도 종종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일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내가 세운 계획 안에서 복음이 작동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감옥 안에서도 일하시고, 죄수의 입술을 통해서도 황제의 집을 흔드십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 1:12). 세상이 보기에 바울의 투옥은 복음의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눈에 그것은 진전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잘 되어야, 건강하고 성공해야,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복음도 더 잘 전해진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삶은 그 생각을 뒤집습니다. 쇠사슬에 묶인 그가 황제의 심장부에 복음을 심었습니다. 풍요로운 자리가 아니라 가장 낮고 갇힌 자리에서 복음이 꽃을 피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는 말씀의 실제 모습입니다. 자족을 배웠다는 바울의 고백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었습니다. 감옥에서도 빌립보 교회에 기쁨의 편지를 쓸 수 있었던 사람,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차라리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다'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고백이었습니다.
빌립보서의 핵심은 2장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헬라어로 '케노시스', 즉 자기 비움이라고 부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으나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사업이 잘 되던 시절,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들을 사줄 수 있었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기울어 아무것도 해줄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자녀들 곁에 함께 앉아 이야기를 들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자녀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 때가 언제냐?" 그들은 한결같이 대답했습니다. "아버지가 우리 옆에 그냥 앉아 계시던 때요." 비움이 오히려 채움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케노시스가 그러합니다. 그분이 자신을 비워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죽음을 통해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낮아지심을 통해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낮아짐이 높아짐의 길이었습니다. 비움이 충만의 통로였습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은 말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이 땅에서도 다르게 삽니다. 그들의 삶의 방향이 다르고, 그들의 기다림이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가 우리의 낮은 몸을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키실 것을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건네는 인사가 있습니다. 빌립보서의 마지막 절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빌 4:23).
주, 예수, 그리스도. 세 단어입니다. 주는 온 우주의 주재이신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는 그분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다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분이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이 세 단어를 제대로 안다면, 이보다 더 크고 풍성한 인사는 없습니다.
감옥에서 황제의 집 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진 것도,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간 것도, 낯선 성도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일도, 모두 이 한 문안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심령에 있다면, 우리는 낯선 사람에게도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그 손 내밀기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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