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0~13)
형편이 어려울 때 사람들은 흔히 성경 한 구절을 꺼내 듭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장 13절입니다. 이 구절은 가정의 거실 벽에, 가게의 계산대 옆에, 사무실 책상 위에 걸려 있습니다. 수험생의 책상 앞에 붙어 있기도 하고, 새벽기도 시간마다 합창처럼 외쳐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 구절 바로 앞에 무슨 말씀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 직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3절은 사실 이 고백의 결론입니다. 능력을 받아 모든 것을 이루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고백의 이유인 것입니다.
1990년대 말, 경제 위기가 한국 사회를 강타하던 시절의 일입니다. 작은 교회를 섬기던 한 목사가 성도들에게 이 구절을 들어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그 설교를 들은 몇몇 성도들은 사업을 시작했고, 교회는 더 큰 예배당을 짓기로 결의했습니다. 수년 후, 그 교회는 부도가 났습니다. 예배당 건축 도중 자금이 끊겼고, 사업을 시작했던 성도들 중 상당수가 빚더미에 앉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부족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처음부터 그 구절을 잘못 읽고 있었던 것일까요?
바울이 빌립보서를 쓴 것은 로마의 감옥 안에서였습니다. 그는 지금 화려한 선교 성공담을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쇠사슬에 묶인 채, 재판을 기다리며, 자신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처지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그는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배부름과 배고픔, 풍부와 궁핍, 그 모든 자리에서 처할 줄 아는 비결을 익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건이 갖춰졌기 때문에 만족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조건이 어떻든 상관없이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상태를 말합니다.
사실 자족은 철학자들도 오래전부터 추구해온 덕목입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만났던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마음의 평정, 곧 '아타락시아'를 추구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정신 상태가 최고의 행복이라고 보았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외부 환경에 지배받지 않는 내면의 자유를 강조했습니다. 동양도 마찬가지입니다. 논어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베고 누웠으니,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도다." 안빈낙도, 가난함 속에서도 도를 즐기는 삶입니다.
이러한 자족들이 가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자족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훈련하고 스스로 도달하는 자족이라는 점입니다. 자기 수양과 철학적 단련을 통해 욕망을 줄이고 현실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고상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자족은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자리에서 출발합니다. 바울의 자족은 '배운' 것입니다. 스스로 닦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바울 자신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하늘의 계시를 받은 사람입니다. 셋째 하늘까지 이끌려 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습니다.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될 만큼 그를 심각하게 괴롭히는 질병이었습니다. 어떤 병인지 성경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지만, 갈라디아서의 표현을 보면 복음을 듣는 사람들조차 시험에 빠질 만큼 눈에 띄는 병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을 천사처럼, 그리스도처럼 영접했다고 합니다. 십자가 복음의 능력이 바울의 초라한 외모를 뚫고 나온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당연한 요청입니다. 복음을 더 잘 전하기 위해, 사역에 방해되지 않기 위해 제거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이랬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바울이 원한 것은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은혜였습니다. 바울이 원한 것은 제거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동행이었습니다.
이 응답을 들은 바울은 이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각주에 따르면 '머물다'는 말은 원문에서 '장막으로 덮는다'는 뜻입니다. 약함 위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텐트처럼 쳐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역량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함 그대로인 채로 그 위에 그리스도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배운 자족의 실체였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에서 바울은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묘사합니다. 바른 복음을 따르지 않고 교만해진 자들,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고, 투기와 분쟁과 비방이 끊이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 이런 진단을 내립니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 종교가 이익을 취하는 수단이 된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의 특징은 자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늘 더 높은 자리, 더 큰 축복, 더 특별한 은혜를 향해 경쟁합니다. 천국도 등급이 나뉘고,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헌신을 독려합니다. 이런 구조 안에서는 결코 만족이 올 수 없습니다. 만족은 시스템의 적이기 때문입니다. 불만족한 사람이 더 헌신하고 더 많이 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이익을 위해 경건을 쓰는 것이 아니라, 경건으로 자족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단호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이것은 체념이 아닙니다. 진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그 사이에 우리가 진짜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더 이상 덧없는 것들을 향해 달려가지 않습니다.
전 국무총리를 지낸 고 김종필씨는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써두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인생 90을 살아보니 89년이 헛됨을 알았다." 아흔 해를 살고서야 겨우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나이와 상관없이, 경험과 상관없이, 듣고 믿는 순간 이것을 압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영원하신 분이 이미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바울이 배운 자족은 결국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것, 예수님이 전부라는 것을 아는 것, 예수님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헛되고, 예수님이 있으면 아무것도 없어도 풍성하다는 것을 아는 것, 그러므로 자족은 성품의 훈련이 아닙니다. 욕심을 억누르는 의지의 결단도 아닙니다. 자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에게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고백은, 내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내게 능력을 주시는 분이 계시기에, 배고파도 괜찮고 가난해도 괜찮고 갇혀 있어도 괜찮다는 고백입니다. 조건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그분이 함께 계시기에 모든 조건을 감당할 수 있다는 신앙의 언어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자족이 선물로 주어지길 바랍니다. 더 갖지 못해 불만인 삶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이 과분함을 알아 감사하는 삶, 예수님 외에는 더 원할 것이 없다는 고백이 우리 입에서 나오는 그날까지, 우리는 이 자족을 배워가는 길 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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