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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에베소서

에베소서(40) - 겨자씨의 믿음, 오직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2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에베소서 3:12)

수요일 저녁, 교회 친교실에는 청년부를 갓 졸업하고 결혼 3년 차에 접어든 박서연이 구석 자리에 앉아 손에 든 종이컵만 만지작거리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간증의 밤'이었습니다. 앞서 나간 자매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습니다. "저는 3년 전 암 4기 판정을 받았어요. 의사도 포기한 상태였는데, 기도원에 올라가서 사흘 밤낮 금식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셋째 날 새벽, 온몸에 뜨거운 기름이 부어지는 것 같은 체험을 했어요. 그리고 다음 정밀검사에서 암세포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여기저기서 탄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어서 다른 형제가 나섰습니다. "
저는 사업이 부도 직전이었는데, 새벽기도를 100일 작정하고 드렸더니 거짓말처럼 큰 계약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걸 그때 확실히 알았어요." 박서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녀에게는 그런 극적인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병에 걸린 적도, 파산 직전까지 몰린 적도, 새벽에 불덩이 같은 것을 느낀 적도 없었습니다. 그저 매일 아침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남편의 도시락을 싸고, 저녁이면 지친 몸으로 성경을 몇 구절 읽다 잠드는 평범한 나날이었습니다. '나는 저들만큼 하나님을 뜨겁게 만난 적이 없구나.'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녀의 신앙은 초라해 보였습니다.

그날 밤 그녀는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해온 최정희 권사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
권사님, 저는 왜 이렇게 밋밋할까요. 사람들은 기적을 체험하고, 방언도 하고, 응답도 화끈하게 받던데 저는 아무리 기도해도 그런 게 없어요. 제 믿음이 약한 걸까요?" 수화기 너머에서 최 권사님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연 자매, 마가복음 7장을 한번 펴 보세요."

성경을 펼치자 낯선 장면이 나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먼 길을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는 것을 보고 트집을 잡는 장면이었습니다. "
이상하지 않아요?" 최 권사님이 물었습니다. "손 씻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 먼 길을 와서 따지고 든 걸까요?" 박서연은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최 권사님이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온 뒤에, 그 고난이 자기들이 율법을 제대로 안 지켜서 온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더 철저히 지키려고 율법을 잘게 쪼개고 또 쪼개서 온갖 세부 규정을 만들었죠. 그게 나중에 미쉬나, 더 나아가 탈무드가 됩니다. 원래는 제사장이 성전에 들어갈 때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정이었는데,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사람이 밥 먹을 때마다 지켜야 하는 법이 되어버린 거예요."

"
그러니까… 원래는 거룩한 의미가 있던 게, 점점 형식만 남았다는 거네요?" "맞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보세요. 15절.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최 권사님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습니다. "서연 자매, 이 말씀은 손 씻는 것만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여기서 '밖에서 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 우리의 경험, 체험, 노력 같은 것들을 다 가리켜요. 그러니까 오늘 간증의 밤에서 자매가 들은 그 뜨거운 체험들, 극적인 응답들, 그것들이 신앙의 진짜 내용이 아니라는 거예요."

"
그런데 권사님, 그분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건 아니잖아요." "물론이죠. 하지만 이런 걸 생각해봐요." 최 권사님은 목소리를 낮췄습니다. "제가 예전에 어느 기도원에 갔을 때 들은 이야기예요. 어떤 자매가 무좀이 나은 걸 두고 '발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고쳐주셨다'고 간증하더군요. 또 어떤 형제는 동네에서 좀 놀던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내가 조폭 두목이었다'고까지 이야기를 부풀리는 걸 봤어요."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요?" "체험과 노력으로 신앙을 재는 게 습관이 되면, 사람들은 서로 비교하기 시작하거든요. 누구 기도 응답이 더 크냐, 누구 체험이 더 강렬하냐. 그러다 보면 간증은 점점 더 자극적으로 변하고, 지저분한 과거를 가진 사람일수록 오히려 더 은혜받은 사람처럼 대접받는 이상한 일이 벌어져요."

박서연은 문득 오늘 밤 자신이 느꼈던 초라함이 실은 잘못된 저울로 자신을 재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
그러면 그런 극적인 체험을 한 사람들은 다 잘못된 건가요?" "체험 자체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에요. 요한복음 보면,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베푸신 다음 날, 더 놀라운 표적을 기대하며 몰려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세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겉으로 보기엔 예수님을 열심히 쫓아다니는 사람들 같지만, 사실은 진짜 기적(구원이라는 기적)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는 거예요."

"
그럼 저는 오히려 그런 체험이 없어서 다행인 걸까요?" 박서연이 물었습니다. 최 권사님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서연 자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바리새인이 되는 거예요." "네?" "생각해보세요. '나는 저런 광신도들처럼 기적이나 쫓아다니지 않아서 다행이야, 나는 얌전하고 바르게 신앙생활하고 있어'라고 스스로 만족한다면, 그것도 똑같은 함정이에요. 체험을 자랑하는 사람과, 자기의 '건전한' 신앙생활과 인격과 교양을 자랑하는 사람, 겉보기엔 정반대 같지만 사실 똑같은 사람이거든요. 둘 다 자기가 가진 것으로 신앙을 정의하고 있으니까요." 박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녀 역시 오늘 밤 속으로 '나는 저렇게까지 신앙을 과시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은근한 우월감을 느끼지 않았던가? "그러면 권사님, 대체 우리는 뭘 믿어야 하는 거예요?"

최 권사님은 성경을 몇 장 넘겼습니다. "
예레미야 17장 9절을 보세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우리 마음은 원래 이랬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 마음을 완전히 뜯어내시고 새로 지으셨어요. 에스겔 36장을 보면,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라고 하세요. 그리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안에 두셔서 하늘을 맛보게 하시고, 그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게 하시는 것—그게 바로 구원이에요. 그리고 그 일을 가능하게 하신 게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이고요." "그 새 마음은… 어떤 마음이에요? 이제 저절로 착해지는 마음인가요?" "그럴 리가요." 최 권사님은 웃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얼마나 부족한지 우리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요. 고린도전서 2장을 보면, 그 새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해요. 예수님을 알고, 그분의 마음까지 알아서 그분을 기뻐하고 설명할 수 있는 마음이에요. 이건 자매의 체험이나 노력이나 선행으로 시작되는 것도, 자라는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이 지으시고, 성령이 그 마음을 가지고 우리 안으로 뚫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박서연은 문득 결혼 전 청년부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함께 신앙생활 하던 친구 하나가 방언을 못 한다는 이유로 조바심을 내던 기억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어느 대형 기도원에 방언을 배우는 방이 따로 있다는 얘기를 듣고 거기까지 찾아갔었습니다. "
권사님, 저희 친구는 방언을 못해서 늘 주눅 들어 있었어요. 다들 뜨겁게 기도하는데 자기만 그렇지 못하다고요." "저도 그런 마음 잘 알아요." 최 권사가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방언을 원하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예요. 하나는 교리적 지식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마음, 다른 하나는 남들은 다 하는데 나만 못한다는 열등감이죠. 그런데 서연 자매, 칼빈도, 루터도, 어거스틴도 방언을 했다는 기록이 없어요. 방언 없이도 예수 잘 믿고 천국 갑니다." "그럼 방언이 나쁜 건가요?" "아니요, 저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성경이 말하지 않는 걸 제 생각대로 단정 지을 수는 없으니까요. 다만 제가 여쭤보고 싶은 건 효용성이에요. 고린도전서 14장 12절 보면, 은사의 목적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나와요.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오히려 은사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편이 갈렸어요. 그래서 바울이 은사에 대해 다루는 12장과 14장 사이에, 일부러 사랑 장이라 불리는 13장을 끼워 넣은 거예요. 아무리 대단한 은사라도 사랑(그리스도를 아는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요." "권사님은 방언 해보셨어요?" "네, 오래전부터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면, 남에게 자랑할 거리가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 유익을 얻지 못했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하지 않아요. 바울도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똑같이 말해요. 방언으로 기도하면 내 영은 기도하지만 내 이성은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요. 그래서 자기는 영으로도, 이성으로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하겠다고 해요. 그리고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까지 말합니다."

그해 겨울, 박서연은 뜻밖의 시련을 겪었습니다. 둘째를 임신한 지 얼마 안 되어 유산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밤마다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러웠고,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시 최 권사님을 찾아갔을 때, 그녀는 욥기 7장을 펼쳐 보였습니다. "
'주께서는 어찌하여 아침마다 그를 찾아오셔서 순간순간 그를 시험하십니까… 침 꼴깍 삼키는 동안만이라도, 나를 좀 내버려두실 수 없습니까?' 욥이 고통 중에 이렇게 부르짖었어요. 서연 자매, 하나님은 우리가 침 삼키는 순간까지도 눈을 떼지 않으세요. 그게 때로는 고통으로 느껴지죠. 그런데 그 세심한 시선이 바로 우리 안의 옛 성품, 죄의 습관, 집착과 통제하려는 마음, 스스로를 지키려는 방어벽을 하나하나 깨뜨려 가시는 과정이에요." "그럼 이 고통도… 의미가 있다는 건가요?" "욥은 그 과정을 다 통과한 후에 이렇게 고백해요. '전에는 귀로만 들었던 주를 이제 눈으로 뵙습니다.' 서연 자매, 이게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더 밝히 알아가는 방법이에요.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하는 거예요." 박서연은 그 말을 곱씹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남들 같은 극적인 응답도, 뜨거운 체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것이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달 후, 어느 주일 예배 후 박서연은 최 권사님과 함께 교회 마당을 걸었습니다. "
권사님, 저는 이제 제 신앙이 초라하다고 느끼지 않으려고 해요. 그런데 그럼 제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최 권사님은 걸음을 멈추고 마당 한쪽에 자란 작은 나무를 가리켰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 같다고요. 자라서 나무가 되고 새들이 깃들이지만, 시작은 아주 작은 씨앗이죠. 예수님도 그렇게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오셔서 조용히 죽으셨어요. 그리고 이 말씀은 사실 에스겔 17장을 인용하신 거예요." "에스겔 17장이요?" "거기 보면 큰 독수리가 백향목 꼭대기의 연한 가지를 꺾어다가 낮은 곳에 심는 이야기가 나와요. 이건 유다 왕 시드기야의 이야기예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세워진 시드기야는, 회개하는 대신 몰래 애굽과 손잡고 자기 힘으로 상황을 뒤집으려 했어요. 결국 어떻게 됐게요? 하나님이 그 나라를 멸망시키셨어요. 실제로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까지 무너졌죠." "그럼 그 반대편에 있는 '연한 가지'는요?" "이사야 53장에 나와요.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바로 예수 그리스도예요. 만약 예수님이 처음부터 영광과 권세를 다 드러내며 오셨다면, 우리는 그 앞에 설 수도 없었을 거예요. 죄인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면 살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도 겨자씨처럼, 연한 가지처럼 자신을 감추신 채 아직 구원받지 못한 이들을 부르고 계세요."

박서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그러니까… 저도 시드기야처럼 제 힘으로, 제 체험으로 하나님 앞에 '이 정도면 되지 않았습니까' 하고 내세울 수 없다는 거네요." "바로 그거예요. 우리는 '내가 이만큼 애써 성경 공부하고 선행했으니 보십시오'라고 세상에 자랑할 수 없어요. 예수님 자신이 겨자씨로, 연한 순으로 감추어져 계시니까요. 그렇다고 아직 서투른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정죄하며 우리만 잘난 것처럼 살아서도 안 돼요. 우리가 가진 것은 연약한 사람을 일으켜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데 쓰라고 주신 거예요."

그날 저녁, 박서연은 집에 돌아와 다시 아이를 재우고 설거지를 했습니다. 화려한 간증도, 뜨거운 체험도 없는 하루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그 평범함이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문득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굶주리며 시험받으신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마귀가 "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시험했을 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답하셨습니다. 그 40일은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요약하는 동시에,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인생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성도의 삶에 찾아오는 모든 시험은 우연이 아니라, 성령이 이끄시는 가운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 거기에는 반드시 뜻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박서연은 설거지를 마치고 성경을 펼쳤습니다. 오늘은 몇 구절 읽지 못하고 잠들지도 모릅니다. 극적인 체험도, 화려한 간증거리도 없는 하루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알고 있었습니다. 그 조용한 순종과 신뢰야말로, 겨자씨처럼 감추어진 채 자라가는 진짜 믿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